스코틀랜드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에서
영국에서 왕의 초청은 영광스럽게도 이번이 두 번째였다.
12년 전 만났던 찰스는 왕자의 직분이었고 이번에는 국왕으로서의 찰스를 만났다. 왕실의 상징인 왕관이 찍힌 봉투에는 영국 폐하로부터 온 초청장 위로 남편과 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든버러 홀리루드하우스 궁전(the Palace of Holyroodhouse)의 가든파티'초청장이었다. 파란색 입장 카드 두 장과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으로 가는 지도, 가든파티에서 있을 순서가 들어있었다. 영국 국왕으로부터의 초대라니 신기하면서도 무척이나 설레었다. 설레기는 우리 두 딸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희끗희끗 보이는 내 앞 머리를 보더니 비닐장갑을 끼고 검은 염색약을 발라주었고 연분홍 꽃이 그려진 내 검정드레스에 어울린다며 발가락에다 분홍빛 매니큐어도 발라줬다. 가든파티가 있던 화요일(2일) 아침에는 더 분주했다. 첫째 딸은 고데기로 내 머리를 곱게 안으로 감아주고 둘째 딸은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눈썹과 마스카라에 이어 둥근 브러시를 올렸다 내려가며 눈과 볼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드레스와 발가락이 보이는 연분홍 높은 구두를 신고 가든파트의 필수조건인 '패시네이터(fascinator, 장식용 모자)'를 머리에 썼다. 친구한테 빌린 페시네이터는 커다란 연분홍 꽃이 있고 그 옆으로 깃털이 달려있었다. 평소에 화장도 안 하고 하이힐을 신지 않는지라 이렇게 치장을 한다는 자체가 낯설고 거추장스러웠다. 하지만 혹시나 왕을 만나서 악수를 하게 된다면 이런 예의는 당연히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가든파티는 무엇인가?
매년 영국 런던의 버킹엄 궁전과 스코틀랜드의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에서 가든파티가 이루어진다. 시작은 빅토리아 여왕 때였다. 왕실 가족이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든파티를 열게 되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왜 초대되었을까 궁금할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 처럼 우리가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지역사회에 물어봐야겠지만 남편은 스코틀랜드 틸리라는 마을의 지역교회 목사로 있다. 나는 남편 때문에 덩달아 초대된 사람이다. 가든파티에서 만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경찰이나 자선단체에서 일하는 사람, 스카우트, 과학자, 간호사 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날 초대된 사람은 총 8천 명이었다.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은 오후 3시부터 입장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가 두시 반. 여유 있게 도착했다 생각했는데도 입장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줄이 엄청 길었다. 입구에서부터 경찰들이 서 있고 파랑 입장권, 여권과 집주소가 적혀있는 증명서류를 보여주면 입장할 수 있었다. 메인 가든까지 들어서는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가든파티에서 무엇이 제공되는가?
가든에 들어서자 군악대의 화려한 연주와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가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가든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건 에든 버러에서 유명한 아서시트(arthur's seat)였다. 푸른 언덕 위로 깍겨진 암벽덩어리가 날씨가 흐린데도 그 웅장함이 그대로 돋보였다. 아서시트 밑으로 파티 텐트가 세 군데가 있었다. 텐트 안에는 샌드위치, 케이크, 파이, 아이스커피, 주스, 차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 입 크기의 라즈베리 타트, 샌드위치, 크림치즈케이크를 골라서 밀크차와 함께 먹었다. 입으로 쏙쏙 들어가자마자 스르르 녹는 게 맛있었다. 저마다 화려한 색깔의 드레스와 스마트한 양복을 입고 거기에 맞는 가방, 구두와 모자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왔다. 어쩜 이 많은 사람 중에 똑같은 드레스가 하나도 없을까. 접시를 다 비울 때쯤 저만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왕실가족이 도착한 모양이다.
2024년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의 가든파티에 등장한 왕실가족은?
오후 4시가 되자 군악대에서 영국 국가를 연주했고 힘찬 박수와 함께 찰스 국왕(75세)과 그의 부인 카밀라(76세), 왕의 막냇동생이자 에든버러 공작인 에드워드(60세)와 소피(59세) 공작부인이 등장했다. 우리는 왕이 등장한 곳에서 조금 떨어진 정원에 있어서 왕이 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삼십 분. 한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서로서로 주먹만 한 거리를 두고 겹겹이 서 있어서 다리 한 발작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한 시간 이십 분이 지나서야 왕은 경호를 받으며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국왕을 볼 수 있다는 건 불가능했다. 남편이 손을 높이 들어 사진을 찍는 바람에 그나마 사진으로 찰스 왕을 볼 수 있었다. 왕은 지금도 암 투병 중이지만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모습이 좋아 보았다. 왕과 에든버러 공작은 검은 모닝 슈트와 검은 모자,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과연 영국의 전통적인 신사다움을 보여주었다.
올해 행사는 7월 4일 실시되는 총선으로 인해 규모가 축소되었다고 하지만 처음 경험한 나로서는 8천 명이나 모인 거대한 파티였다. 덕분에 18세기말,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집이었던 홀리우드 하우스 궁전(the Palace of Holyroodhouse)에도 처음 가 보았다. 보통 입장하려면 22파운드(3만 9천 원)를 내야 한다. 물론 궁전 안은 안 들어갔지만 알록달록한 꽃이 가득한 정원만 산책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왕실 가족이 들어가고나서야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비웠다.
에든버러 기차역에서 높은 구두를 벗고 앉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왕 한번 보겠다고 이른 아침부터 난리를 치고 한 시간 반 동안 기차와 차를 번갈아 타면서 정원 입구와 정원에서 두 시간 넘게 왕을 기다렸고 고작 사진에 찍힌 왕을 본 게 전부라면 이 가든파티를 좋았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초청장을 받고 설레었던 마음은 어느새 달아나고 서운함과 피곤함이 온 몸을 감쌌다. 다리가 아픈 건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어떤 여자는 같이 걷던 남자등에 업혀서 쓰러지듯 가기도 하고 아예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 걸어가는 사람도 제법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찰스 국왕은 오늘, 가든파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며 잠에 들었을까. 아니면 그도 거추장스러움과 피곤함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힘들게 펴가며 잠을 청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