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아마 열 살쯤으로 기억한다. 아빠말로는 할머니와 3년간 살았다는데 기억을 거슬러 보아도 영상같이 뭔가를 함께 했던 기억보다는 사진처럼 뚝뚝 끊긴 몇 장면들로 할머니를 기억한다. 거실에 앉아 마당을 쳐다보며 부채질을 하던 할머니. 모두가 텔레비전 앞에서 드라마를 볼 때면 할머니 방과 거실 사이의 문에 기대어 앉았던 할머니. 나에겐 두 언니와 여동생이 있는데 왠지 할머니와 우리 사이엔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가 할머니 방에 들어간 적도 없었고 할머니가 우리 방으로 들어온 적은 더더욱 없었다. 할머니가 유일하게 직접 만드신 반찬이 하나 있었는데 고춧잎장아찌였다. 고춧잎과 고추가 거멓게 물들어진 장아찌 종지가 항상 할머니 밥그릇 앞에 놓여 있었다. 혼자 드시려고 담그신 거라 눈치를 보면서도 가끔 먹어봤던 기억이 난다. 맵지도 않고 짭자란 게 어찌나 맛있던지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젓가락이 자꾸 올라갔었다.
할머니는 열세 살에 도강 김 씨 집으로 시집을 갔다. 그때는 다 어렸을 때 시집갔다고 하지만 풋내가 풀풀 나는 열세 살 우리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어린아이가 낯선 아저씨를 만난 것도 혼란스러울 텐데 거기다 막중한 책임까지 떠 맡겼으니. 그 책임이란 건 '아들'이었다. 도강 김 씨 집안에서 자꾸 딸만 생긴다고 무손을 걱정하던 증조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전라북도 서북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쪽이 아들 기세가 세다나 뭐라나. 만만다행으로 할머니는 아들 넷에 딸 셋을 낳았다. 모처럼 도강 김 씨 집안에 아들 풍년을 맞이한 것이다. 할머니는 김 씨 집안에서 기둥 같은 존재가 되어 절손의 불효를 면하는 반면 우리 엄마는 딸만 넷을 낳았다. 금쪽같은 아들의 대를 잊지 못하고 불효를 해버린 셈이다. 할머니 눈에 딸부자였던 우리가 그리 곱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빠가 말하는 할머니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아빠의 고향 전라북도가 그래 봬도 한국 최대의 곡창지대를 자랑하는 곳이라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할머니 때는 쌀 한 톨이 없어 배를 곯아야 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할아버지가 강제 노동으로 일본을 가면서 할머니 혼자 어린 세 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광복 후 할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순사건에다가 한국전쟁으로 농사일을 제대로 못 했을뿐더러 할아버지가 노름에 손을 대면서 가족은 뒷전이었다. 거기다 네 명의 아이들은 더 생겼고 늘어난 식구들만큼 할머니 일도 투잡, 쓰리잡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밥 동냥부터 시작해서 바느질, 남의 집 농사를 짓는 건 기본이고 젓갈을 만들어 팔거나 숟가락, 젓가락을 사서 내다 팔기도 했다. 이런 고된 노동은 흰쌀 한 공기 뚝딱 해치워도 금세 배가 고프련만 본인은 물에 간장 몇 숟가락을 풀어 마시는 게 전부였다. 어느 날 할머니가 숟가락을 팔려고 바다 건너 다른 동네로 넘어갔다. 하지만 조수 시간대를 모르는 바람에 오는 길에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산을 넘는 일도 다반사였다. 하루는 만삭의 몸으로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만든 젓갈을 머리 위에 이고 시장에 나갔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시장에 도착해 젓을 팔고 있는데 산끼가 와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다시 그 높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한다. 집으로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기절초풍할 노릇인데 그 무거운 젓갈을 고시란히 이고 들어왔단다. 아빠말을 듣고 보니 할머니는 정말 철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무시무시한 폭풍이 닥쳐도 쓰러질지언정 뿌리하나 뽑히지 않고 다시 일어설 사람. 깡다구 근육이 겹겹이 쌓여 화석처럼 굳어버린 아이언 우먼 같은 사람 말이다. 할머니는 애를 낳고도 그 핏덩어리 같은 애를 둘러업고 젓갈통을 머리에 인채 산을 넘고 또 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내가 뉴질랜드에 있을 때 들었다. 워낙 할머니와 관계가 별로 없었던지라 그냥 무덤덤하게 비보를 접했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할머니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했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 사람이 궁금해지고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어쩐지 겸연쩍고 애처로워진다. AI와 대화를 하고 로켓으로 우주여행을 떠나는 지금 할머니의 이야기는 미지의 우주보다 더 동떨어진 세계라는 기분이 왠지 서글퍼진다. 할머니의 여든여덟 생에서 정작 할머니가 빠져 버린 인생. 그 구멍투성인 할머니의 삶을 이제야 귀 기울여본다. 그런다고 해서 구멍이 메꿔지지는 않겠지만 이런 노력이 할머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유리벽을 조금씩 허무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만하면 잘 살았소. 힘들게 고생 많았소.'
할머니가 없는 공중에다 한숨 같은 말들을 무심코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