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탄광에서 마주하는 할아버지의 등

Sep 18. 2025

주말을 맞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SUMMERLEE'(서머리)라는 곳을 방문했다. 서머리는 영국의 산업 및 역사박물관으로 유명하다. 1836년,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제철소가 설립된 곳이었고 무엇보다도 사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던 영국 산업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거대한 증기 기관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자기 몸집을 덮을만한 하얀 연기를 내뿜고 빽빽 달려보자고 고함을 지를 것만 같았다. 그중에도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철강사업으로 썼던 단단하고 웅장한 쇠 덩어리들을 모아 둔 전시관 보다 건물 뒤쪽으로 '탄광 역사촌'이라고 적힌 푯말이었다.

19세기 탄광으로 쓰였던 이곳을 일반인에게 관람할 수 있도록 내부를 열어 두었다. 우리 가족은 노란 안전모를 쓰고 두 명의 안내원을 따라 들어갔다. 한 안내원은 제일 앞에서 우리를 인도했고 두 번째 안내원은 제일 뒤에서 우리를 따라왔다. 소풍을 떠난 병아리처럼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선생님의 지시를 기다렸다. 갱도의 입구를 열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새까만 어둠이 우리를 맞이했다. 조심조심 종종걸음으로 그 좁은 갱도 안을 들어서자 두 번째 안내원이 갱도의 입구를 닫아 버렸다. '쿵'. 먼지 만한 빛마저 사라지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숨을 죽였다. 옆에 있던 여섯 살 아들이 내 허리를 더듬거리다 꼭 끌어안았다. 소풍은커녕 뒷목에 달린 털조차 바짝 곤두설 만큼 섬뜩했다. 안내원은 이내 손전등을 켰다. 그제야 내 발 밑에 있는 크고 작은 돌들과 길처럼 보이는 통로가 희미하게 보였다.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딧 불만한 빛으로 새까만 석탄을 어떻게 캐야 했을까. 좁은 갱도 안으로 더 들어 갈수록 냉랭한 공기 때문에 오돌토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미 비가 많이 오고 난 후라 어떤 곳은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다. 땅굴 안에도 개미처럼 저마다 방들이 있었는데 그 굴마다 온 힘을 다해 채굴하는 광부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한 광부는 갱도를 뚫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손에 쥐고 있었고 한 광부는 돌벽을 향해 망치를 들고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니 몸을 공벌레처럼 웅크려야지만 들어갈 수 있을 작은 구멍 하나가 보였다. 그 안에 있는 광부는 옆으로 납작하게 누운 채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벌거벗은 등 뒤로 긁히고 찍히고 멍든 자국들이 선명하게 퍼져있었다.

지하로 깊이 내려갈수록 갱안의 온도가 30도를 훌쩍 넘는다고 안내원이 말했다. 습도가 매우 높아서 옷을 입고 작업하기엔 불가능하단다. 당시 광부들은 방진마스크나 보호안경도 없었을뿐더러 집에서 가져온 빵 몇 조각을 먹으며 하루 13-14시간 동안 일을 했단다. 더 놀라운 사실은 광부들의 일당이 시간당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석탄을 캐 온 무게만큼 이라고 한다. '딴짓하지 말고 죽도록 캐보시오' 왠지 조롱이 섞인 잔인한 노동이었음을 덧붙여 주는 듯했다. 그때 광부들의 평균 수명이 고작 마흔 살이었다. 탄광 안에 갇혀버린 유해가스가 매일매일 그들의 폐를 짓눌렀을 것이고 고독과 고통을 삼키느라 동전만 한 숨구멍이 조여왔을 것이다. 안내원이 입구문을 열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았던 암흑을 등지고 나올 수 있던 건 빛이었다. 신선한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온몸의 세포와 장기들이 살았다고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참 아상도하지. 맑은 공기를 마시면 마실수록 납작하게 누워있던 광부의 등이 자꾸만 떠올랐다. 우리 할아버지 등 같아서였을까.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어린 아빠의 기억에 할아버지는 자주 피를 토했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 거실 위에 있던 사각형 액자 안에 있다. 웃음이나 슬픔, 감정이 다 달아난 얼굴. 표정으로 봐서는 어떤 분이셨을지 상상할 수가 없지만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전부였다. 아빠는 광복 후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건 기적이라고 했다. 가로 1m, 세로 90cm. 사람이 설 수조차 없는 비좁은 지하 바닥에서 할아버지는 광부로 일했었다. 일본에서 광복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저 깊은 지하 갱도에서 일하느라 기쁜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고 했다. 유일하게 해가 뜨고 지지 않는, 지구의 흰자 같은 곳에서 그는 어떻게 숨을 쉬며 견딜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일본의 어느 지역, 어떤 광산이었는지 광부로 어떻게 지냈는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고 한다. 그 외로움과 두려움 또한 어둡고 새까만 갱도의 깊이만큼이나 깊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광부였다고 말했다. 괜히 말했다. 차 앞창문이 자꾸 뿌예지는 게 운전하기 어려웠다.

집에 돌아와 전기밥솥에 밥을 안쳤다. 밝은 등 아래서 저녁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할 것이다. 이 보통의 하루가 햇빛을 포기한 사람들의 땀과 노동이 녹아져서 만들어진 에너지라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진으로, 내 머릿속에만 저장됐던 할아버지 말고 살아 움직이는 할아버지가 오늘 내 꿈에 잠깐 들렀으면 좋겠다. 자랑스러운 나의 광부 할아버지. 어색해서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하더라도 나무껍질 같은 할아버지 등을 그저 토닥거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