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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스혜영 Jan 31. 2022

설 분위기 나네.

백석/선우사

집을 들어서려는데 현관문 앞에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고향이 그리울 것 같아 만들어 봤어."  노트와 함께. (스코틀랜드 친구가 만들었다. )

붉은빛으로 물든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건 분명 김치였다. 

서둘러 흰밥을 했다. 흰밥도 김치도 나도 나와 앉아서 소박한 저녁을 맞는다.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백석이 쓴 <선우사>의 시 두문이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김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꾸 날 보고 놀려 쟤들이. 내가 메이드 인 스코틀랜드라고. 여기서 고춧가루가 없으니 고추장과 미소를 넣었고 배추가 없으니까 청경채를 넣었다고.. 나 보고 가짜래."

잠잠히 듣고 있던 횐 밥 머리 위로 하얀 스모크가 올라간다. 

"가짜라도 너 꺼는 먹을 수 있겠지...

나 보고는 플라스틱 밥 이래. 불량식품이라나. 별 하나 받았어.

세찬 바람에도 땅을 움켜 잡으며 태양볕 아래서 푹푹 나이 먹어갔는데. 나도 자연산이라고. 

봉지에 적혀 있는 '초밥용' 쌀이라는 게 오해였어. 사실 나는 이탈리아산 리조토용이니까."

나는 밥 숟가락을 들었다 내렸다. 

"너희는 김치 먹고 있는 내가 영국인으로 보이니? 바울에게 로마 시민권이 있었던 것처럼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도 시민권을 바꿔야 하는 이유가 있었거든. 영국 시민권 받는 날 여왕한테 인사하고 영국 국가 열심히 외워서 불렀어. 내 팔뚝에 영국 국기 문신한다고 내가 영국인이 되는 건 아니더라. 영어는 늘지도 않고 모국어 어휘능력은 떨어지니 가끔 내가 누구지? 생각할 때가 있어. 저번에 한국 가니까 나를 '외국인 동포'라고 하더라. 낯설었어."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오늘이 설이야. 알아?"

"어." 김치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흰밥도 이어 말했다. 

"설 분위기 나네. 너희가 있으니까."


우리들은 정체성이 흔들려도 서럽지 않다

쟤들이 뭐라 해도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김치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고추장과 미소로 스코틀랜드 친구가 담근 김치


백석/선우사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혜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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