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럭 기럭 기러기도 북에서 오는구먼,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처음으로 글라스고에 있는 한인교회에 갔다. 한 청년분이 옅은 보라색 성가대 가운을 입고 특송으로 피아노를 쳤다. 그게 '오빠 생각'이었다. 감미롭고 독특한 화음. 부담스럽지 않을 적절한 강약 조절과 완벽한 쉼표. 재즈 스타일의 피아노 선율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너무 오래된 곡이라 잊혀지지 않았을까 라는 의심할 겨를도 없이 내 입에서 절로 가사가 흘러나왔다. 생전에 나에게 오빠가 존재하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었을까.
엄마 생각이 났다. 1925년도 이 동시를 지었던 최순애 선생님의 마음이 엄마와 같지 않았을까.
엄마는 6.25 전쟁 중에 오빠를 잃었다. 엄마에게 오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40년이 훌쩍 지난 이제야 엄마의 오빠가 궁금하다니.
"나는 오빠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 그때 나는 왜 그리 무심했을까?"
한국전쟁이 시작 됐을무렵 경기도에 살았던 엄마는 10살 많은 언니의 등에 업혀 충청남도까지 앞만 보고 내려갔다. 그때 엄마 나이는 겨우 네 살. 당연히 몰랐겠지. 무심한 게 아니라.
너 다리가 땅에 닿으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야. 단단히 겁을 준 언니의 등에서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무섭게 매달렸던 네 살 꼬마. 밥 한 끼 먹기 어려웠던 시절, 멀리까지 내려온 피난민을 위해 끼니를 나누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어서 엄마와 식구들은 살 수 있었다. 파란곡절 끝에 경기도 이촌 집으로 다시 돌아왔건만 북한 군인들에 의해 그 마을에 남아있던 18세 이상의 아들들은 모조리 북으로 끌려갔었다. 그중에 엄마의 오빠가 있었다.
"오빠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들었어. 그래도 나 오빠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
오빠를 찾겠다고 남아있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도 문을 두드리며 수소문 한지도 수십 년이 흘렀다. 기럭 기럭 기러기도 북에서 오는구먼, 비단구두가 아니더라도 그냥 빈손으로 달려왔으면 와락 끌어 안아보고 싶을.... 오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이름없이 묻혔고 우리는 그들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엄마가 남긴 카톡 메세지였다.
며칠 전 여섯 살 아들이 귀뚜라미가 노래한다고 들어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정말 노래했었다.
12살 최순애 선생님과 4살 엄마의 귀에 슬프게도 귀뚤 귀뚤 울어댔던 귀뚜라미.
다음엔 아이한테 말해줘야겠다. 귀뚜라미가 슬프게 울 때도 있더라고.
우리는 기억하며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