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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인형을 입은 나의 꿈

어린 나에게 보내는 편지

by 도로미

어릴 적, 백 원짜리 동전 하나만 생기면

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막다른 곳의 허름한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찢어진 포스터와 먼지 쌓인 좌판 위,

내 눈은 언제나 종이 인형을 찾았다.

그곳엔 속옷 차림의 공주가 다소곳이 서 있었고,

곁엔 드레스를 입혀줄 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찌든 담배 냄새를 풍기던 주인 할아버지는

내 손에 꼭 쥔 동전 하나를 받으시곤

어정어정 일어나 좌판 아래 종이뭉치를 꺼내어

툭 가볍게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아가, 이쁜 거 많으니까 천천히 골라보거라. “


나는 그 말이 그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슬리퍼가 몇 번 벗겨지며

조심조심 다시 신어가며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는 이미 종이 속의 공주가 되어 있었다.

드레스를 갈아입히고, 상상 속 왕자님을 기다리며

책상 위 작은 무대에서

나는 신데렐라가, 백설공주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군산 여행길.

기차가 멈춘 낡은 역 근처에서

오래된 문방구를 만났다.

그리고 그 안, 한쪽 구석에

종이인형 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호동 단칸방의 골목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시 어릴 적 나로 돌아가

종이인형 한 장을 들고 깡충깡충 집으로 뛰어갔다.


그때 나는 몰랐지만,

종이 속에서 공주가 되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꿈을 꾸는 연습을 멈추지 말라고.

상상의 날개는 아주 작고 얇지만,

마음을 날아오르게 할 수 있다고.


언젠가 골목 어귀에서

다시 어린 수연을 마주친다면

나는 말없이 웃어줄 것이다.


네 덕분에 나는 지금도 꿈을 쓴다.

어린 내가 꾼 상상이,

어른인 나에게는 진짜 삶이 되었다.


작가의 말

한 장의 종이인형은, 어쩌면 내 인생 첫 번째 상상이었습니다.

입히고 벗기며 공주가 되었고, 기다리며 꿈을 꾸었습니다.

지금도 글을 쓴다는 건,

그때의 나를 다시 꺼내어

또 한 장의 드레스를 입혀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 [수연의 브런치 글 더 보기](https://brunch.co.kr/@6735c529d53b426#articles)


“어릴 적 구매했던 시중 종이인형 중 하나입니다.
개인의 회상과 비상업적 글에 사용하며,
저작권 문제 발생 시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종이인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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