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나 혼자서도 잘 놀았어! 잘했지?
서울 천호동에 우리 가족이 자리를 잡았을 때,
엄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나와 여동생의 전학 수속이었다.
그 시절,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여동생은 1학년,
막내 남동생은 겨우 여섯 살이었다.
목포 북교 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수업 시간.
선생님은 나를 칠판 앞으로 불러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전하라고 하셨다.
나는 칠판 앞 교단 위로 살짝 올라섰다.
한 계단 정도 되는 그 높이 덕분에
아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마주할 수 있었다.
서울로 전학 간다며 부러운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
그리고 울먹이며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
그 모든 감정 앞에서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떨궜다.
천호 초등학교에 들어선 날,
나는 운동장 가득한 아이들 수에 놀랐다.
교무실에서 안내받은 말!
아이들이 너무 많아 한 교실에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뉜다는 것.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는 오전반으로 배정되었다.
한 교실에 70여 명,
오전반과 오후반을 합치면 그 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
그런데 나는, 놀랍게도 금세 적응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촌뜨기였는데
누구 하나 나를 놀리지 않았다.
새 친구들은 선입견 없이 나를 친구로 받아주었다.
그 따뜻함이 어린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교길엔 항상 여동생을 기다렸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힘 없이 걸어오다 나를 발견하고
해맑게 뛰어오던 여동생....
우린 서로의 체온이 필요했다.
그 따뜻한 숨결이 지금도 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어느 날,
엄마는 내게 남동생에게 한글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인형공장에서 일했고,
아빠는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냈다.
엄마는 아침마다
남동생이 낮선 길을 나서 잃어버릴까봐 걱정되어
집 문을 밖에서 잠그고 나가셨다.
그리고 매일 아침,
내게 말씀하셨다.
“수연아, 학교 끝나면 꼭 바로 집에 와야 해.
동생 봐줘야 하니까 꼭이야.”
나는 약속을 지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방은 늘 어지러져 있었고
동생은 혼자 텔레비전을 보다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누나, 나 혼자서도 잘 놀았어! 잘했지?”
그 말투가, 그 표정이,
지금도 내 마음에 깊이 박혀 있다.
한글을 가르칠 때
동생이 잘 따라오지 못하면
답답한 마음에 야단치기도 했다.
그러면 동생은
금세 서러워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날 밤,
일에 지쳐 귀가하신 부모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말없이 쓰다듬으셨다.
그 손길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 있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때의 그 단상,
교단 위에서 아무 말 못했던 어린 나,
하교길에 손을 잡았던 동생,
문밖에 자물쇠를 채우고 돌아서던 엄마.
이 모든 장면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시절이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아직도 따뜻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 작가의 말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그때의 골목, 그때의 방 안, 그리고 너무 어렸던 우리 삼남매의 얼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실 나는, 그 시절을 씩씩하게 견뎠다고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며 하나하나 꺼내보다 보니 처음으로 마음 깊이 올라오는 감정이 있었다.
‘우리 막내, 그 좁은 방 안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엄마는 매일, 그 문을 잠그고 나설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외로움과 책임감, 그리고 부모님의 묵묵한 헌신이 이제야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모든 걸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고,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을 이해하기엔 너무 많이 커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시절이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있고,
그 기억은 내 글 속에서 다시 숨을 쉰다는 걸.
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
그리고 가족의 마음을 조금 더 따뜻하게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글은 충분히 빛을 낸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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