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삐삐

그때 그 사랑스러운 내 친구 삐삐

by 도로미

내가 목포에서 서울 천호동으로 이사 온 날

주인집과 나란히 붙은 단칸방 세 칸 중

우리는 맨 앞방에 살게 되었다.


짐을 다 옮기고 나자

아버지는 커다란 생선가시처럼 생긴 안테나를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셨다.

나는 그 아래에서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두근거렸다.


“아빠! 아직 멀었어요?”


이마 가득 땀을 흘리면서도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지.


그렇게 나는 드디어 **〈말괄량이 삐삐〉**를 볼 수 있었다.

하얀 말 위에 올라탄 빨간 머리 주근깨 소녀,

삐삐는 어느 날 조용한 마을에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순수한 남매 애니카와 토미와 친구가 되어

유쾌하고 자유로운 모험을 펼쳐나간다.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나는 삐삐,

버르장머리 없다며 꾸짖는 아주머니를

손가락 하나로 번쩍 들어 나무 위에 올려놓는 삐삐.

세상에 없을 것 같은 힘과 상상력의 소유자.


“삐삐, 엄마 아빠는 안 계셔?”

애니카가 조심스레 묻자, 삐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빠는 남태평양 식인종의 왕이고, 엄마는 천국에 계셔.”

“그럼 넌 공주야?”

진지하게 대답하는 삐삐에게 애니카는 장단을 맞춰준다.


사실 애니카는 알고 있었다.

삐삐의 아빠는 해적이었고,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그래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살며,

언젠가 돌아올 아빠를 기다리는 삐삐의 마음을.

그 애틋한 희망을.

그래서 삐삐는 씩씩하고, 당당하고, 눈부셨다.


어릴 적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고, 동생들도 있잖아.”


서울 아이들 사이에서

사투리를 쓰는 낯선 소녀였던 나는,

그날 삐삐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낯선 도시에서의 달동네 생활.

말 못 할 설움과 외로움이 내 안에 있었지만

삐삐를 보며

나도 저렇게 씩씩하게 살아야지.

나도 언젠가 웃을 수 있겠지.

그렇게 희망을 품었다.


지금은 너무 오래된 기억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엔

양갈래 땋은 빨간 머리,

짝짝이 양말과 신발을 신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삐삐가 살아 있다.


“삐삐야,

그때 나는 너를 참 좋아했어.

너 덕분에 나는 희망을 품었고

용기를 얻었어.

그래서 지금도 나는

조금씩, 한 걸음씩 세상을 향해 걸어가.

고마워, 삐삐.

네가 가르쳐준 거야.

보고 싶다. 삐삐.”


�작가의 말

어릴 적, 서울 천호동 작은 단칸방에서 처음 만난 삐삐는

단순한 어린이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삐삐는 저에게 용기였고, 자유였고,

낯선 도시에서의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주는 친구였지요.

가진 건 없지만 상상력과 유쾌함으로 세상을 이겨내는 삐삐를 보며

어린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나도 저렇게 씩씩하게 살아야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 삐삐가 제게 속삭였던 말들은

여전히 제 안에서 살아 숨 쉽니다.

삐삐를 통해 어린 시절의 나를 다독여주고,

지금의 나를 위로해주고 싶었어요.

이 글이 어릴 적 누군가의 삐삐였던,

그리고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 삐삐를 품고 사는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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