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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다 Jun 09. 2021

자기소개서

특기와 취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15년도 더 넘었으니 자기소개를 한지도 오래됐다.

이제는 이름이나 나이, 나의 아이들 소개 정도가

주를 이루니 고등학생 때까지 하던 자기소개는 영영 할 일이 없어졌다.

학생 때는 자기소개 종이에 이름, 나이, 학교, 주소 같은 것을 적고 중간쯤 적혀있는 특기, 취미란에서부터 손이 멈췄다.

내 특기가 뭘까, 취미는 또 뭘까.

가끔 특기와 취미에 같은 것을 쓰는 친구들이 있었다.

'특기 춤추기, 취미 춤추기'와 같이.

즐겨하는 일이 곧 잘하는 일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지만 그림을 즐겨 그리지는 않았다.

또 노래 듣는 것을 좋아했지만 음악을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결국에 음악을 하는 일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분류됐다.

지금 이 글을 써 내려가면서도 내가 잘하는 일과

즐겨하는 일을 가늠해보며 큰 접점이랄 게 없다는 걸 또 한 번 여실히 느낀다.

-

"너는 다재다능해. 이것도 찔끔 잘하고 저것도 찔끔 잘하고. 근데 그건 별로 좋은 게 아니야. 한 가지를 잘하는 게 중요하지."

글짓기 상, 그림 그리기 상, 무슨 발표회 상같은걸

받아오면 엄마에게 듣던 말이다.

이 이야기를 하며 남편에게 상을 받아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어쩌다 학교에서 상 받은 날은 집에

뛰어 왔다고 했다.

칭찬을 왕창 받고 맛있는 걸 먹을 생각에.

이제 와서 따지고 드는 것도 너무 치사하지만,

-엄마, 지금 생각해봐도 저 말 너무했다. 그치.

-

내 마음속은 '잘'과 '할 수 있는'의 간극이 너무 멀고, 필요 이상의 기준을 단단히 세워 웬만해서는 통과하지 못하도록 검문이라도 하는 것 같다.

'자, 피아노를 칠 줄 안다고? 그래 어디 보자. 음.

아니야 이건 할 줄 안다 뿐이지 잘하는 건 아니야.

자, 다음-'

이런 식으로 얄밉고 쓸데없이 성실하게 구는 마음 탓에 나는 아직까지도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다.

애석한 일이다.

-

15년 만에 아이의 유치원 입학원서에서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자기소개서를 또 만났다.

지겨운 장점, 단점, 특기, 취미.

'이까짓 것 선생님들이 하나하나 보기라도 하겠어? 대강 적어서 내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소개란에 뭐라 적는 순간

그것이 효력을 발휘해서 적은 대로 아이를 휘두를 것 같은 미신적인 마음마저 들었다.

마음속의 '깐깐 검문소' 아무개 씨는 잠깐 빠져달라고 해야 할 참이었다.

우리 첫째가 잘하는 것은 그림 그리기, 춤추기

좋아하는 것은 책 읽기, 춤추기, 노래하기

우리 둘째가 잘하는 것은 가위 오리기, 퍼즐

좋아하는 것은 종이 오리기, 노래하기 등등.

써놓고 보니 주책맞게 눈물이 났다.

내가 가진 깐깐 아무개 씨를 밀쳐내지 않아도 아이들이 가진 특기나 취미 같은 것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

아이가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냐는 물음에 보통의 엄마 아빠들은 뭐라 대답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잘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겠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이다.

나는 내가 하지 못한 일을 아이가 이뤄주길 바라는 우매한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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