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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다 Jun 07. 2021

집밥의 능력

단품 된장찌개

"여보. 오늘은 된장찌개밖에 못 끓였어.

오늘은 찌개에 밥 말아먹어."

-"응. 알았어"

알겠다던 남편은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된장찌개를 먹지 않았다.

"왜 저녁 안 먹었어? 먹기 싫었어?"

-"나는 원래 찌개만 있으면 밥 못 먹어"

"... 그럼 뭐가 있어야 하는데?"

-"음.. 두루치기 같은 거??"

두루치기? 두루치기...?

두루치기가 웬 말이람.

두루치기가 없어서 밥을 못 먹겠다는 남편은 신혼 때는 국이 없으면 밥을 못 먹겠다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몰랐겠지만 그날 이후로 우리 집 냉장고에는 먹으나 먹지 않으나 늘 국이 있었다.

여태껏 지독히도 성실하게 끓여댔건만, 두루치기가 없어서 밥을 못 먹겠다니?

나는 끓여둔 찌개를 냉장고에 던져 넣었다.

-

좀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짜면 짠 대로 집밥이 가진 나름의 맛이라는 게 있다.

집밥을 먹는다는 건 표면적인 맛은 물론이고

재료와 시간을 들여 입 속에 넣을 만한 음식으로

만들어낸 누군가의 수고도 함께 맛보는 것이다.

그러니 집밥은 두루치기정식이 아니라 단품 된장찌개뿐일지라도 소중하고 감사한 음식이다.

-

결혼 전에 남편의 집에 갈 때면 나는 식욕이 솟구쳤다.

그곳에는 시어머니가 해두신 집밥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방으로 곧장 달려가 밥솥에서 밥을 한 그릇 퍼다가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주욱 늘어놓고 열심히 먹었다.

아들 여자 친구가 당신 반찬을 얼마나 먹어 댔는지 일하러 가신 시어머니는 모르셨을 것이다.

반찬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맛있었다.

나는 매콤하게 무쳐둔 조개젓갈이며, 고소한 나물무침이나 빨갛게 버무려둔 무말랭이 같은 것을 흰쌀밥과 먹으며 그런 집밥을 별 감흥 없이 씹어대는 남자 친구를 보다 '이 남자와 결혼하면 반찬은 어쩐담'

하고 얼핏 걱정했던 것 같다.

걱정했던 대로 남편의 미각은 거의 대장금 수준이다.

-

집밥에 목매던 서울살이 속에 내 배를 채운건 8할이 편의점이었다.

지겹도록 먹어댄 삼각김밥과 컵라면.

나중에는 속이 아파 가장 집밥 같은 것을 고르느라

'누룽지탕'이라고 쓰여있는 걸 사서 먹기도 했지만 코팅된 종이 그릇에 플라스틱 숟가락을 푹 담가

뜨거운 국물을 퍼먹을 때면 애써 '누룽지탕'을

선택한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포장지와 크기, 내용물의 계량과 진열해둔 모양까지도 똑같은 상품은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어도

뱃속에 뚫린 어떤 구멍으로 쓱 빠져나가버리는지

아무것도 채우지 못했다.

아무리 포장지에 열량 250kcal라고 쓰여있다 해도.

-

   속에 10kg짜리 건반을 매고 다니던 나는 

어느 날은 참을  없는 복통으로 만원 지하철에서 주저앉아버렸다.

병명은 급성 장염.

자주 생기던 병이 치료받고 재발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극심한 장염이 된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정을 미뤄두고 며칠간

병실에 누워있으면서 정말 이 짓도 그만두자고

다짐 같은걸 했다.

나에게 집밥은 절실한 것이었다.

만병통치약 같은 것.

-

식탁에 앉아 잘 씻은 그릇에 스테인리스 식기들로 달그락 거리며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식기 끝을 타고 들어오는 집밥은 식탁에 앉은 이가 보낼 오늘을 응원하거나, 하루의 수고를 위로하는 누군가의 고마운 손길이다.

입은 가끔 요란스럽고 특별한 것을 찾지만 뱃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삶이 탈 나지 않게 다독이는 것이 심심하고 소박한 집밥의 능력이다.

-

단품 된장찌개를 거절당한 이후로 남편을 위해

매일 국 끓이는 일은 관뒀다.

그럼에도 귀찮음을 이기고 오늘도 주방에서 손을

움직이는 것은 아직 내 집밥의 정성을 알아주는

입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어. 나는 국수 같은 것보다 밥이랑 엄마 김치 먹는 게 제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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