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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아나무 Aug 29. 2023

무중력의 시간

그래도 죽지는 않겠구나

 남편이 남겨놓은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 가면서 몸이 아파왔다. 내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천지도 모르는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울 건 없었으므로 나는 망자를 욕되게 하는 어떤 일도 겁 없이 맞섰다. 

그러나 너무나 무서웠다. 내가 전혀 모르는 일에다 많은 사람들과 시시비비를 따지고 장부를 들춰야 했으니까.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나머지 시간은 온통 그 일에 매달리면서 분노를 누르고 냉정해지려고 애를 썼다. 심장이 터질 것 같으면 엉엉 소리쳐 울었다. 엄청난 냉정과 집중의 시간들이었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 탓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저기 아픈 건 병원을 다니면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의사가 사별로 인한 상실감이라고 했다. 스트레스 중 가장 큰 스트레스,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이란다. 그런가 했다. 나는 스트레스인 줄도 몰랐는데, 이게 스트레스였구나. 사는 게 너무 허망하고 공허해서 내가 살아있을 남은 기간이 끝이 안 보이는 숙제처럼 여겨져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고. 애들이 졸업하고 자리 잡을 때까지 나조차 잘못되면 안 되니까.


식탁에 앉아 창 밖을 보면 나무나 건물이나 하늘의 구름, 찬란한 햇살도 무의미하다. 이들 시야를 넘어 내 눈은 허공을 헤매고 다닌다. 구름 뒤의 허공, 파란 하늘 뒤의 허공을 간간이 새가 가로질러 날고, 구름이 흩어지기도 한다. 아무 감흥을 주지 못하는 물상들이다. 

시야 너머에는 망자들이 가 있을 어느 별들이 있을 것 같다.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나 이 우주 어딘가에 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이 자리 잡은 먼 곳이 있을 것 같다. 육체가 사라지면 영혼도 없어진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있던 영혼들이 흩어지면 그 영혼들이 어떻게 된단 말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만큼 어딘가에, 이 우주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거란 말이다.

그 영혼과 접신이라도 하고 싶어 간절히 물어본다. 가 있는 거기가 어디냐고, 나 먼저 죽게 하겠다던 약속을 왜 안 지켰냐고...... 

끝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혼자만의 대화로 한낮이 정점을 지나고 있을 때, 딸한테서 전화가 온다. 저 멀리 가 있던 정신이 창 안으로 들어온다. 머리가 띵하다. 정신을 차리려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장을 보려고 나선다. 길을 걸으면 육중한 건물들과 갖가지 표정의 사람들 사이를 걷는 내가 어색하고 낯설다. 바삐 바삐 걷던 카페길, 장 보러 가던 길, 한 잔 하러 가던 길, 모두 일상을 채워주던 익숙한 길인데, 나서보면 누가 쳐다볼세라 고개를 숙여 없는 사람처럼 숨어 걷는다. 사람들을 피해 걸으면 좀 편해진다.


봐 온 장거리를 부엌바닥에 두고, 이걸 할까 저걸 할까 하다가, 다 귀찮아져서 장바구니째로 냉장고에 넣어둔다. 욕구도 의지도 없다. 털썩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본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가지 많은 벚나무도 지면에 떠 있고, 고인돌 같은 마당의 돌판도 속이 빈 돌 같다. 중량을 재는 저울이 마음이기라도 한 듯 눈앞의 사물들이 무게를 잃어버린다. 그냥 있을 뿐이다. 그들도 나도 무중력의 공간 속에 있다. 

대부분의 일상이 허공을 걷는 것 같아 오욕칠정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가리던 이성이 정지되고 초연해진다. 중량을 잃은 내 모습이 보인다. 그릇을 깨뜨려도 생각이 없고, 냄비를 태워 먹어도 까짓것 그만이다. 저질러 놓고도 반성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마음 없는 무중력의 시간, 나는 그냥 이런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중력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관성적으로 살아지는 게 신기하다. 인간의 목숨이 참 힘이 세다. 모든 생명의 속성은 살기 위함이라더니 진짜 그런 것 같았다. 나를 보며, 내가 이렇게 힘들어도 죽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이 골 저 골 알 수 없는 어느 골짜기를 헤집고 다닐 때, 아직도 어려 보이는 자식들이 나를 허공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아이들의 중량은 내 허공의 깊이보다 무겁고 두려워, 삶은 무게를 지니고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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