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아버지가 돌아가시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 라고 취업을 해서 한 달 한 달 월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한 달에 한 두번 들르는 시골집에는 부모님만 살고 계셨다. 고등학생이 된 막내는 자취생활을 하고 있어 주말만 집에 들렀다. 월급 받으면 적금 넣고 부모님 용돈 드리고 막내 학비를 내야 하는 빠듯한 살림이어도 기분은 좋았다. 틈틈이 여행도 다니며 20대의 젊음을 누리고 있다. 엄마는 일을 많이 해서 인지 내가 고등학교 3학년부터 쓰러지기를 반복하셨다. 그래도 체력으로 버티고 일을 해 나가다 오십 대 후반부터는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셨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살짝 끌고 다녔다. 자존심이 강해서 그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다며 동각출입도 하지 않았다. 농사는 아버지가 도맡아 하시게 되고 엄마는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일을 하면서도 늘 부모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직장 동료들과 산에도 가고 기차여행도 다녔다. 교복을 입고 학교 다닐 때와는 다르게 꽉 낀 청바지에 후드티만 입고 다녀도 멋스러움이 넘치던 시절.
직장생활 첫 해, 여자 네 명이서 벚꽃이 피는 전군가도를 다려 보자는 당찬 계획을 세웠다. 하이킹을 가기로 한 것이다. 출발은 좋았다. 차도 없고 사람들만 간간이 보이는 탁 트인 길 위에 씽씽 달리는 기분, 중간중간 흩날리는 벚꽃 밑에서 사진도 찍고 좋은 날씨에 바람도 선선했다. 이제 막 농사를 시작하려는 농부들의 논을 가는 모습도 좋았다. 빈 논에 보랏빛으로 가득 덮은 자운영의 물결도 참 멋있었다. 두 시간이 걸려 전주 덕진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중간에 아치형 다리가 있고 호수 안에는 초록빛 연꽃이 싹의 틔우고 있었다. 평소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아닐 데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다. 페달을 밟는 발길이 느려지고 지쳤다. 길가에 털썩 앉아서 더 이상 못 가겠다는 친구들과 용기를 냈다. 차를 세워보기로 했다. 두 손을 용감하게 들고 흔들었다. 몇 대의 차가 지나가고 트럭 한 대가 멈춰 섰다. 아저씨에게 사정이야기를 했다. 이리까지 가는데 너무 힘들어서 한 번만 태워줄 수 없냐고... 흔쾌히 승낙을 했고 화물칸에 자전거를 싣고 우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때 자전거를 타고 이리에서 전주까지 가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참 용감했구나.
시골집에 가는 날 이리에서 광주 터미널까지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두 시간 거리, 차창밖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며 자다가 졸다가 보면 광주터미널에 도착한다. 도암 가는 218번 버스로 갈아타고 익숙한 길을 따라가면 다니던 중학교, 걸어 다니던 산 길, 저수지를 지나면 동네 앞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인다. 쓸쓸해지는 집, 엄마가 아픈 후부터는 청소도 되지 않고 아버지가 겨우 끼니를 해결하는 정도니까 여기저기 치울 게 많다. 소를 기르던 외양간은 비어 있고 아이들 소리로 활기가 넘치던 마당도, 엄마의 음식 만드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던 부엌도 먼지만 자욱하다. 옷만 갈아입고 방을 쓸어내고 먼지를 털고 닦는다. 다음은 부엌, 엄마대신 쪼그리고 앉아 불을 때던 아버지의 구부정한 어깨가 너무 안쓰럽다. 그릇은 다 꺼내서 다시 닦고 햇볕에 말린다. 주말만이라도 따뜻한 밥 해드리고 최선을 다한다. 일요일 오후 두 시만 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픈 엄마와 아버지를 두고 일하러 가야 하는 현실에 눈물이 난다. '엄마 밥 잘 드시고, 부끄러운 것 아니니까 걸어 다니며 열심히 운동해야 돼' 내가 말하면 '오메 그게 맘대로 안된단 말이다' 젊을 때는 동네에서 제일 일 잘하고 잘 놀던 엄마였는데, 그 시절처럼 되지 않는 자신을 탓하며 엄마는 점점 쫄아들고 있다. '나 갈게',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의 무거운 마음속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래도 아버지가 계실 때는 괜찮았다. 구부정한 허리로 밭고랑을 매던 아버지는 결국 병이 났다. 헛배가 부르고 자꾸 배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큰 오빠가 모시고 간 병원에서 병명도 모른 체 입원을 했다. 복수가 차면 알부민 주사를 맞았다. 노란 주사약이 들어간 만큼 복수는 빠졌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결국 집으로 모시고 가라는 병원 측의 말에 따라 시골집에 자리보존하고 누우신 아버지는 하루하루 병세가 나빠졌다. 서울에 있던 작은오빠가 와서 병시중을 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5월 어느 날 야근을 하고 있는데 주임이 불렀다. 굳은 얼굴을 한 표정을 보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시골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어. 얼른 가봐' 왈칵 감정이 차오르고 눈시울이 빨개졌다. 어떻게 기숙사로 돌아왔는지,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대충 짐을 챙겼다. 늦은 밤 공단거리는 한산했다. 깜깜한 길을 걷다 등 켜진 택시를 불러 세웠다. 전남 화순까지 갈 수 있나요? 기사는 이유를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요' 택시를 타고 뒷좌석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간간히 물어보는 기사님의 질문에 대답은 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화순을 지나 익숙한 산길을 돌아 동네 앞에 다다랐을 때는 한 밤중이었다. 이미 예정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익산에서 도암까지 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쉼 없이 달려 도착한 집, 담벼락에는 근조라는 주황색 등이 걸려 있었다. 토방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가니 엄마가 부둥켜 앉았다. '병풍뒤에 아버지 있다' 병풍을 젖히자 관 속에 윤기없이 앙상한 모습으로 반듯이 누워있는 아부지. 하얀 옷을 입은 모습이 천사같다. 늘 웃음이 많아 호인이던 그 모습 그대로 아팠으면서도 마지막은 웃는 모습으로 ... 아부지, 아부지, 그제서야 아버지의 부재가 실감이 났다.
이십 대 학생신문을 벗어나 직장인으로 살면서 아픔도 많고 슬픔도 많았다. 늘 부모님의 안부를 걱정해야했고 동생의 학비를 책임져야했다. 누가 시킨것은 아니고 자발적인 것이었지만 늘 마음을 짓누르는 무언가강 있었다. 그럼에도 틈틈이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청춘을 빛내려고 한다. 많은 것을 해보지 못했지만 그 시절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충분히 아팠으므로, 그래도 지나올 수 있었던 청춘이라서, 아프니까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