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유년시절 내가 태어난 동네는 두메산골이었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광주에서 버스를 타면 두 시간을 산골짜기를 돌고돌아 가야했던 깊은 산골이었다.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는 터덜거리는 버스가 지나갈 때면 흙먼지가 뿌옇게 나라려도 버스 뒤를 따라가는 것이 더 좋았던 시절이었다. 하루에 두 세번 밖에 없는 버스를 먼 발치서 기다리기도 했다. 성품 좋은 아버지는 양씨로 너그럽고 인자한 성격으로 막걸리 한 잔에 빙그레 짓는 미소가 참 멋진 분이었다. 솜씨 좋은 엄마는 이씨로 조물조물 뚝딱 어떤 음식이든 힘들지 않고 맛있게 만들어 내는 마법사였다. 오빠 둘, 언니 하나 아래로는 여동생이 둘 있었다. 여섯 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시절 동네는 동그런 형태로 낮은 산을 배경삼아 스무가구가 양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작은 마을이었다. 동네방네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지칠줄 모르고 놀았던 어린시절 기억속으로 떠난다.
내가 태어난 것은 1965년도 정월 초 이튿날이었다. 설날 다음날 태어난 것이다. 옛날 설은 큰 명절이었다. 다행히 엄마는 친정살이를 하고 있어서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설날부터 시작해서 온 동네가 ㅇ리가 친척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명절을 지나고 나면 서로서로 인사를 다니며 음식을 나눠먹으며 한 해으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그런 명절을 지나고 바로 다음날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내가 태어났다고 했으니 그 고생은 오죽 했으랴! 그렇게 태어난 순하고 별탈없이 한 해 한해 무럭무럭 자라났다.
위로 두 살 터울의 작은 오빠가 있었고 젖이 부족한 엄마는 돼지족을 삶아 먹으며 아기들의 젖을 먹이려 애쓰셨다고 한다.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의 빈 적을 물며 허전함을 달랬던 나의 아기시절 그래서인지 식탐이 많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형제자매사이에서 뒤쳐지지 않으려 애를 썼던 나의 아기시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겨울에 태어난 아이였다.
마을 아픙로는 범바위산이 자리잡고 있어 그 아래로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동네어귀에서 보면 맨 꼭대기에서 자리잡은 우리 집 마당은 흙으로 덮여 있었지만 항상 물이 잘 빠지고 고슬고슬 했다. 마당 한 켵에는 두엄자리가 있었고 마당가에는 돌담을 쌓아 엄마가 심어 놓은 해당화가 붉게 피어 있었다. 초가 지붕에는 토방과 툇마루가 놓여 있었고 아래로는 고구마를 저장하기 위한 토굴이 작게 파여 있었다. 큰방, 작은 방, 정재로 되어 있었고 작은방은 큰오빠가 쓰고 안방에서 실곱식구가 살았다. 엄마의 부엌은 흙으로 되어 있었지만 오랜 세월 잘 다져진 흔적으로 반들반들 윤기가 날 정도였다. 가마솥, 작은 솥, 양은으로 된 큰 솥이 걸려 있어 가마솥에 밥을 하고 작은 솥에는 국을 끓이고 양은으로 된 솥에는 물을 끓여서 쓰는 용도로 사용했다.
행랑채에는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있었고 옆 칸은 변소이고 뒷편은 두엄을 쌓아두었다. 여물을 끓이는 가마솥은 대형으로 풀을 한 바지게 볏단을 넉넉히 넣고 끓여도 될 만큼 큰 솥이었다. 소죽을 쓰면 딸린 방은 뜨끈뜨끈해 동네 사랑방으로 쓰였고 봄이면 대나무로 된 채반을 얹어 누에를 기르고 했다. 까만 누에알은 하얀 한지에 놓고 며칠이 지나면 꼬물꼬물 누에가 태어나고 작은 뽕잎을 사각사각 갉아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학교 끝나면 뒷밭에 가서 뽕잎을 따다 누에를 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