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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쿰척 Jul 20. 2021

#3. 점약있?

사회생활에서 점심 약속이란

왜 오늘은 목요일일까. 출근해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역시나 "오늘의 메뉴"이다.

우리 회사는 한식 코스와 양식 코스가 있지만, 둘 다 인터넷상에서 유명할 만큼의 맛은 아니다. 딱 5천 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맛. 오늘은 카레와 투움바 파스타다. 이럴 땐 역시 카레지~


오늘도 메신저가 울렸다. 은서 언니였다.

서은서 : 92년생, 여, 미혼, 입사동기, 최근에 남자 친구랑 헤어짐. 

> 서현아~ 

미리보기만 봐도 부탁이거나 점심 먹자고 하는 것이다. 이 언니는 왜 필요할 때만 찾는 거지?

>>웅 왜~

> 점약있?

마땅한 핑계를 찾지 못했다. 이 언니 그냥 혼자 먹기 싫어서 나 찾는 건데. 할 얘기도 없는데.

>>없어. 먹을래?

> 웅 나 오늘 먹을 사람 없다ㅠ 같이 먹 어조~ 이따 12시에 1층에서 만나~

>>알겠어 오전도 빠샤


이런 영혼 없는 말들은 연습을 안 해도 잘도 나온다. 이참에 연기나 해볼까?

오늘 오전에는 박 팀장님한테 시달리느라 시간 확인도 못했다. 벌써 11시 50분이네. 오전은 정말 순삭이다.

> 언니~ 1층에서 만나~ 

>>웅웅!


은서 언니다. 언니는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멀리서도 눈에 띈다. 언니 옆에 있으면 나만 오징어 되는데. 아? 큰일이다. 언니가 오늘 검정 티셔츠에 연청바지를 입었는데, 나도 검정 블라우스에 연청바지다. 누가 보면 트윈룩으로 맞춰 입은 줄 알겠다. 언니한테 걸어가는 사이에 "점신"을 켰다. "오늘 같은 날은 사람들은 피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아침에 점신보고 메신저를 봤어야 했다.


> 언니~ 우리 뭐야 뭐야? 오늘 똑같네~?

>>오 그러게~ 오늘날인가 봐~

난 연기학원은 안 다녀도 될 것 같다.


오늘의 인기 메뉴는 투움바 파스타였다. 언니는 파스타를 먹는다고 해서 웬만하면 나도 먹을까 했는데, 줄을 서는 동안만이라도 떨어지고 싶어서 카레를 선택하였다. 

카레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뚝뚝 끊기는 대화에 난 날씨 얘기도 꺼냈다가, 건강 얘기도 꺼내고 회사 내 가십거리까지 얘기하다 보니 밥을 어느새 다 먹긴 했다. 오늘은 스무디 마셔야지. 아무래도 배가 안 찬 것 같다.


점심을 다 먹고 어느 카페를 갈까 혼자 머릿속으로 고민하였다. 투썸, 공차, 커피빈? 어느 카페에서 스무디가 제일 맛있는지 머릿속을 굴렸다. 오늘은 공차를 가자고 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순간,

> 서현아~ 나 커피는 민우랑 마시기로 했어~


순간 당황했다. 점심 약속은 점심+커피 아니었던가. 언제부터 점심이 말 그래도 "점심"만 뜻하는 거였던가. 


>>어? 난 그럼 뭐하지? 난 당연히 카페까지 가는 줄 알았지~

>아 진짜? 미안 미안. 점심만 먹자고 했던 건데.

>>알겠어 잘 먹어~


너무 화가 났다. 언니가 언제부터 점심 약속을 밥만 먹는 걸로 정의했던 걸까. 내가 만만한가 싶었다. 언니가 커피 사 먹는 돈이 아까워서 사무실에서 맥심을 타서 커피빈 앞 벤치에서 먹자고 할 때도 괜찮았다. 언니가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안 하다가 사무실 비품이나 회사 내 소문을 물어볼 때만 연락하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건 도리에 어긋나는 거지. 남은 30분 동안 나 혼자 뭐하라고? 


오늘의 교훈 : 일어나자마자 오늘의 운세 확인하기


터벅터벅 혼자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에 가장 위에 있는 런닝맨 동영상을 켰다. 유재석이 이광수를 괴롭히는 아주 재밌는 영상인데 하나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은서 언니의 행동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이 언니는 내가 만만한 게 확실하다. 1000%다. 


입사하기 전에 회사동기에 대한 로망이 컸다. 난 대학교 동기들이랑도 친하게 지내는 데 실패했고, 친구가 많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취업 준비하면서 회사동기에 대한 로망이 컸던 것 같다. 나의 입사동기는 총 6명으로 남자 셋 여자 셋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합인가. 우리는 매일 밤마다 저녁을 먹고 생일도 챙겨줬다. 한 달 동안. 여자 동기들은 남자 친구 만나느라 바빴고, 남자 동기들은 집에 가느라 바빴다. 난 동기들이랑 놀고 싶었는데, 같이 놀 동기가 없었다. 그 이후 동기들은 그저 필요할 때 찾는 존재가 되었다.


남자 동기들은 그래도 메신저를 자주 했다. 화나는 일 있을 때 욕도 하고 상담도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 지는 모르겠지만 여자 동기들은 정말 필요할 때만 연락하였다. 특히 은서 언니. 


아, 그렇게 점심만 먹고 헤어지고 은서 언니는 메신저 한 번 보내지 않았다. 


회사생활에서 마음 맞는 동기마저 없으면 난 무슨 낙으로 회사를 다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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