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
책의 내용 첫 페이지, 번역판(위), 영문판(아래)
작가는 첫 문장에서 왜 1인칭 '우리', 'us'를 사용했을까?
소설의 첫 문장은 제목만큼이나 신경 쓰고 다듬어서 놓는다. 그래서 3인칭 시점의 소설에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문장은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다. 작가가 첫 문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의 밝힌 유튜브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1인칭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민진 작가가 말하는 첫 문장의 의미(유튜브)
문장의 의미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혹독한 역사적 시대 상황을 극복하고 헤쳐나가면서 그들의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담아낸 소설 내용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 뜻은 알겠는데, 이것을 3인칭으로 '역사가 그들을 망쳐놓았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살아냈다. History has failed them, but they don't care.'라고 했다면, 여기서 그들(them)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us)'라고 했을 때는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 독자가 된다.
드라마 <파친코> 시즌1 마지막 8화에서, 주인공 선자가 김치를 담은 수레를 끌고 오사카 시장에 나가는 장면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방황을 끝내고 결심이 선 브루스 웨인이 배트카를 몰고 고담시를 구하러 나서는 장면을 볼 때와 같이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이었다. 김치 장사가 도시를 구하는 것도,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못지않게 위대한 일이라 여길 수 있다. 역사가, 시대가 삶을 망쳐놓고 있을 때, 좌절하지 않고, 굴하지 않고 버티며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존재들의 소중함, 위대함.
https://twitter.com/AppleFilms/status/1521979808594358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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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은 총을 들고 싸울 병사 한 명, 한 명이 아쉬울 상황에서도 전후의 베트남을 위해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따로 빼서 프랑스로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정작 자신조차도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삶은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할 것이고, 그런 삶은 역사와 상관없이, 묵묵히 삶의 영역 구석구석에서 제 역할을 해 나가야 이어질 수 있으므로.
파친코 한국어판 출판문학사상 Pachinko 영문판 저자 이민진
드라마 <파친코> 시즌 1이 원작 소설과 가장 다른 점 두 가지는, 일제 강점기, 즉 젊은 선자의 이야기와 1980년 후반, 노년의 선자의 이야기를 교차해 가며 보여준다는 것과, 고한수(배우 이민호)의 젊은 시절을 서사를 추가한 것이다. 소설에는 그가 어떻게 야쿠자 조직의 2인자 위치에 오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서사가 없다. 즉, 드라마 각본을 쓰면서 이 부분을 창작한 것이다. 여기에 동경 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한 부분을 다룬다. 10대의 고한수 역을 한 이민호의 모습이 어색하고, 고한수 아버지 역의 정웅인과 이민호가 제주도 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부분은 해석을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다소 있다. 감독이 한국계 미국인이라 우리나라 배우의 연기 톤도 다르고, 자막도 좀 어색하다. 그래도 1,000억이 넘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작품이라 고증도 잘 된 것 같고 의상과 소품, 장치 등은 몰입감을 높인다.
원작 소설책도 좋지만, 드라마도 제작비와 제작 시스템 모두 전에 없던 특별한 시도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시즌 2가 기다려진다. 원작 소설을 쓴 이민진도 1.5세대 한국계 미국인이고, 드라마 제작진도 '사실상, 심리적' 미국인들이라, 그들이 표현하는 우리 근대사 이야기가 신선해서 좋다. 다만 애플TV에서 상영해서 안 본 사람이 많다는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