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행복을 원하는 삶을 살았다. 행복은 언제나 손에 닿지 않는 그리운 단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들의 시선에서 내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라는 건 없었다. 모든 게 변명 같은 사치일 뿐이었지... 가장 친한 친구도 내게 말했었다. "네가 호강에 겨워서 그런 소리를 한다."
그러니 내가 누구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나 혼자만의 불행이었다. 나 혼자만의 독백이었고 누구도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아픈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같이 사는 가족마저도 나의 불행을 느끼지 못했었다. 나는 그렇게 예쁜 모습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 시기가 무려 17살이라는 가장 꿈 많을 시기였다. 사실은 나도 나의 불행을 눈치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그냥 하루를 보내는데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조금 아팠었고 의사들은 하나같이 신경성이라고만 대답했다. 어딜 가든 똑같은 소리나 내니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았다. 신경성이라니 나도 그런 소리는 하겠다라며 병원을 나올 때마다 신경질이 잔뜩 났었다. '이렇게 짜증이 나는데 신경성이겠지 그럼 뭐라고 해야겠냐.'라며 투덜거렸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너무 착했었다. 착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뭐하러 착했을까 싶다. 예쁜 불행을 갖고 하루하루 버텼으면서 뭐하러 착했을까? 그냥 화를 내던가 동생처럼 깽판을 치던가 했어야지! 어쩜 그렇게 미련했을까..
나의 부모님은 너무 바빴고 너무 헌신적이었고 자신들을 희생해서 갈아 넣듯이 살았었다. 그렇게 힘들게 하루를 버티신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았던 것이다. 나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몇 번은 말했던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하루를 버티는데도 너무 힘겨웠던 나의 엄마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난 그냥 착한 아이로만 하루하루를 견뎌낼 뿐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때의 나는 나이답지 않게 별 5개가 붙은 심오한 예술영화를 좋아했다. 지금이라면 머리가 아프다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들이었다. 그런 침묵 같은 영화를 보며 내 마음속의 침묵을 위로했는지 모르겠다. 그땐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뭔가 편안한 기분이 들었거든... 보기만 해도 갑갑하고 좀 답답한 느낌의 영화인데 그런 영화가 나를 편안하게 했었다.
사실 나는 굉장히 수다스럽다. 학교를 다녀오면 그날의 모든 일을 한 번에 쏟아낼 정도로 엄마의 정신머리를 탈탈 흔들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부터 가슴속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밝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희한하지... 난 그렇게 변해갔고 꿈꾸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왜냐면 생각이란 걸 하는 게 내겐 마라톤같이 느껴졌거든. 생각을 하게 되면 불행이 느껴져서 생각을 멈추게 되어버렸다. 스스로 멈춘 것이다. 그래야 내가 숨 쉴 수 있었으니까.
우리가 어렸을 땐 장래희망이란 걸 썼다. 매년 그런 걸 써서 성적표에 죄다 기록해두는 것이다. 내 꿈은 매년 바뀌었고 나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17살이 된 나는 꿈이란 걸 꾸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적는 게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아 졌다. 아마도 나는 현실을 알게 되었었나 보다. 내가 더 이상 꿈을 꿔봤자 현실의 나는 닿지 않는다는 걸 알았나 보다. 나는 그렇게 열일곱의 하루를 살았다. 그땐 내 감정이 무언지 정확히 알지 못했었다. 나이를 먹고 나서야 왜 그랬는지 아는 거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내가 착하지 않았다면 내가 잘 보였을 텐데... 그랬다면 내가 그만큼 힘들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나도 울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다시 꿈꿀 수 있었을 텐데..
과거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에게 그 시간은 온통 후회로만 기억되나 보다. 하지만 때때로 즐거웠던 에피소드들도 있긴 했었다. 나라고 죽상만 하고 있진 않았으니까.. 그때의 친구들은 착하고 명랑한 내 모습만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예쁘게 불행해지고 있었다. 17살의 나는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그 누군가를 찾지 못했다. 그때의 나를 위로해준 건 그저 별 5개의 답답한 예술영화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