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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Apr 19. 2024

연아의 꿈(2)

한국 호텔은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으로 도심 속에서 여유와 활기를 느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며 대한민국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평범하게 살아온 연아는 이렇게 고급스러운 시설에 혼자 들어서면 아직도 자꾸 주눅이 드는 편이다. 오늘도 지하 주차장에서 호텔과 가장 가까운 주차구역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속도가 빨라서 귀가 먹먹해지는 듯했다.      

스카이라운지는 은은한 조명과 부드러운 커피 향이 났다. 특히 예약한 자리는 서울의 전경이 보이는 멋진 자리여서 더욱 분위기가 있었으며 실내는 평일이라서인지 호젓하고 여유로웠다. 연아는 약속 시간 20분 전부터 미리 와 앉아 있었다.           

“이런 호텔은 하루 숙박비가 얼마나 할까?”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목욕도 즐기고 아침에는 조금 느긋하게 일어나 편안하게 식사를 마치고 하루나 이틀 종일 쉬면서 호캉스 다운 호캉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연아가 기다리던 손님이 호텔 라운지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들어오는 사람은 유신건설 기조실장 최종윤이다. 50대 초반의 그는 일류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 모든 방면에서 인맥도 넓고 시야도 탁 트인 사람으로 이 회사의 오너 한재수의 최측근으로 통한다.      

한때 회사가 어려워지자 많은 임원들이 이해관계를 따지며 한 회장을 버리고 다른 회사로 이직했었다. 어차피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서로 얽힌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릴 적 다정했던 친구는 멀어져 가고 이해가 얽힌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세상이 어지럽고 어려울수록 인간은 더욱더 초조하게 이해를 찾는 것이다. 그때 최 실장은 한재수와 함께 체질 개선과 위기 극복에 앞장섰고 새로운 시장에도 진출해 시장 다각화를 통해 지금의 튼튼한 중견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칠십 중반의 회장 한재수와 회사 개국공신의 수는 일부 남아 있었지만 지난해부터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역할만 충실하며 실질적 경영은 최 실장에게 맡기고 있다.      

1년 전, 그 무렵 입사 5년 차 광고부의 팀장급인 연아에게 기조실장이 직접 전화를 했다.          

“진연아 씨?”          

“네. 실장님.”          

전화기 내선에 ‘기조실장’이라는 직책이 표시되자 연아는 황급히 수화기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소?”          

연아는 최 실장과는 개인적으로 만난 일은 없었지만, 회사 창립 기념일 행사와 간부들을 대상으로 회사 로고에 대해 미리 선보이는 자리, 업무 관련 보고 등으로 몇 번 만나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던 그 정도의 사이였다.          

“네. 잘 있습니다.”          

“언제 나한테 저녁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소?”          

“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쯤.....?”          

진연아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름이 알려진 회사의 기조 실장이 자신에게 선행을 베풀 이유는 없지만 어떤 모략을 꾸미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음. 오늘이 월요일이니깐 수요일 저녁 7시쯤 한국호텔 라운지에서 봅시다.”          

“번거롭더라도 혼자 와주면 좋겠어요. 나하고 단둘이 만나는 겁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          

“예약은 미리 해두겠습니다. 식사하면서 의논 좀 합시다.”          

최 실장은 연아에게 정중히 말하고는 다시 웃는다.          

연아는 주저주저하며 용기를 내어 물었다.          

“실장님.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혹시 제가 미리 참고자료라도 정리해둘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하하.... 별 일 아니니깐 그날 얘기하죠.      

제가 오히려 부탁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직접적인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최 실장의 말 덕분에 연아의 생각은 정돈되었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부탁한다고 했으니 기조실장과 연아가 서로 윈윈(win win)할 수 있는 거래가 있다는 것만은 추측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실장이 대체 무슨 일로 자신을 만나자는 걸까?”          

궁금증과 걱정이 머릿속을 헝클어뜨려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으며 이상하게도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틀 동안 무슨 탐문수사 하듯이 뒤지고 다닐 일은 더욱 아니지 않은가!          

“많이 기다렸지요?”          

오후 7시에 만나기로 했었는데 시계가 20분이 더 지나 있었다. 연아는 미리 온 시간을 더해 40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있던 연아가 잠자코 일어섰다. 막상 마주 보니 최종윤은 미남이다. 갸름한 얼굴이 깨끗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최 실장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문득 맞잡은 손이 참 따뜻하다고 연아는 생각했다.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미안합니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최 실장을 만나는 순간에 그의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 놀랬죠?”          

최 실장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부드럽게 물었다.          

“아.... 예. 실장님. 혹시 무슨 일 때문입니까?”          

“연아 씨에게 제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만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같이 얘기를 하시죠.”          

둘은 생각보다 조촐하게 구성된 음식을 먹으며 가볍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평소에도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편이다. 연아는 가격대가 과하게 비싼 음식보다는 비교적 저렴한 음식을 주문한 최 실장이 오히려 부담이 없어 마음에 들었다.          

“와인 한잔 더 하시죠?”          

식사를 하는 동안 연아와 제 잔에 술을 따른 최 실장이 웃음 띤 얼굴로 연아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우리도 별도의 독립적인 광고회사를 설립할 예정입니다. 일개 부서가 아니라 자회사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회사가 성장할수록 광고의 영향력이 계속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광고에 투자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현대에서 광고는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번의 촬영으로 수억 원을 들이는 연예인의 광고에는 집중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은 의문입니다.”          

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 실장의 말을 이어받았다.           

“맞아요. 저도 현장 일을 하면서 콘티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빈약한 연예인을 더러 봤습니다. 심지어 브랜드명도 잘못 알고 온 경우도 있었어요. 물론, 일부이기는 하지만요.”          

광고 얘기가 나오자 연아의 눈빛이 반들거리며 윤기가 났다. 대화를 가볍게 이끌어준 최 실장에 대한 호의까지 얼굴에 잔뜩 배어 나왔다. 둘이 “일”을 대하는 태도에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짧은 시간 만에 연아는 느꼈다. 최 실장은 그런 연아를 보며 싱긋 웃었을 뿐이다.          

“제가 왜 연아 씨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시죠?”          

“예. 사실은.....     

 혹시 무슨 현장의 자문이나 의견을 들으시려고 하시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연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그녀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말씀인데 광고회사를 맡아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런 일을 맡으실 분은 연아 씨 말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회사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시고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연아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제정신이 아닌 듯 혼미해져 우선은 심호흡부터 했다. 그리고 가슴이 더워지고 웬일인지 콧등이 시큰해졌다. 너무 파격적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개 부서의 팀장에서 하루아침에 자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이다. 꿈같은 일이지만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자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앞섰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만 왜 하필 저를...... 그리고 저는 아직....”          

침을 삼키느라고 말을 다 잇지 못한 연아는 최 실장을 보았다.           

“우리 회사에서도 이것저것 다 알아보고 심사숙고해 결정한 겁니다.”          

최 실장은 알고 있었다. 회사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하는 연아의 모습이 언제부터인가 믿음이 갔다. 그리고 그녀가 회사를 위해 기여한 공은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설립할 광고회사는 앞으로 그룹으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고 있는 유신건설의 명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미 연아 팀은 독특하고 기발한 디자인을 선보이곤 해 분기마다 디자인으로 인해 매출이 올라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 저는......”           

그러자 최 실장이 가볍게 손을 들어 연아를 제지하며 말했다.           

“제가 두 가지 약속은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광고분야에 일절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식 저런 식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연아 씨는 하고 싶은 일만 하십시오. 그렇다고 광고팀에 책임을 지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견적 네고를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클라이언트가 연아 씨를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파격적인 보상을 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 약속만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연아 씨를 믿기 때문입니다.          

최 실장은 결단 있는 말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는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아는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를 하리라 생각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일에 성과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선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어보았습니다.”           

“알겠습니다.”          

연아는 두 손으로 서류를 공손하게 받았다. 서류를 받아 든 연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살 색 손톱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고 언젠가는 이루고 싶었던 목표였다. 일단은 부딪혀보자는 심산이 작용한 것이다. 저 멀리서 한 줄기 빛 같은 것이 비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자신의 힘으로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퍈이다. 지금까지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       

“이제는 본격적인 마케터가 될 것이다.”          

최 실장과 호텔에서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연아는 지금까지 제대로 보지 못했던 파노라마와 같이 펼쳐진 서울의 야경에 마치 꿈꾸듯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듯 길게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밤하늘을 향해 느릿느릿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톱인 제일기획이나 이노션 정도의 랜드로 키울 것이다.      

아니 어쩌면 런던의 WPP나 동경의 덴츠로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두둥~~~ 하는 심장 소리가 서울의 하늘에 깊숙하고도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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