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은 세미나 참석을 위해 서울에 왔다. 1박 2일간의 일정으로 『탄소중립 정책 추진전략과 과제』라는 주제지만 정부 지원사업이나 지원내용도 포함되어 있어서인지 관련 기업은 물론, 환경 단체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리고 특별히 계획은 없었지만 일단은 휴가를 내고 주말까지 서울에 머무를 예정이다.
모든 세미나가 그렇듯 거창한 주제에 거창한 질문과 뻔한 답변이 반복되니 지루할 뿐이다.
영진은 세미나 시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발제를 생략하고 앞으로는 일문일답식으로 짧게 핵심 내용만 논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좋겠다고 하품을 하면서도 생각했다. 지루한 세미나에 지루한 휴식이다.
다만 발제자는 국내 명문대학의 여교수인데 날이 더워서인지 이마를 훤히 들어내 놓고 입을 활짝 벌려 웃는 모습이 좋았다. 아마도 그런 모습까지 없었다면 일찌감치 앉은자리에서 대놓고 푹 잤을 것이다.
중간중간 쉬는 타임에 차 한잔을 들고 호텔 세미나실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쾌적한 관광도시라고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미를 상실한 거대한 회색빛 모습이라는 생각을 만들 뿐이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잠시 마주 오는 시선을 피하다가 다시 한번 상대를 보았다. 짧은 머리에 발랄한 청치마 차림의 여인이다. 왠지 낯익은 얼굴인 듯한데 그렇다고 확실히 알지는 못했다. 아는 체를 해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체를 해야 할지 순간 판단하기가 어렵다.
“안녕하세요?”
다가오면서 상대 여자가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기억 안 나세요? 저 대산시 환경단체 사무국장 손정미입니다.”
“아~~~~.”
그제야 영진은 상대의 얼굴이 확실히 기억났다. 대산시 자원순환 시행계획 용역 자료를 수집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곳을 돌아다니다가 두세 번 환경단체 사무실에 들렀었는데 거기서 본 얼굴이었다. 그땐 여럿이 함께 있어서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먼저 알아봤어야 했는데....”
영진이 민망해하며 아는 체를 하자 정미는 가벼운 웃음을 짓고 다시금 말을 받는다.
“괜찮아요. 저는 연구관님 얼굴이 빛이 나서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봤는걸요.”
정미는 아주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볼수록 매력 있고 호감이 가는 인상이다. 한번 빠진 살은 다시 원상복구 되기가 어려웠던지 전에 봤을 때보다 약간 더 말라 보였다.
“혹시나 모른 체할까 봐 제 딴에는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아는 체한 거예요.”
그전에 환경단체 사무실에서 봤을 때 아이가 둘이라고 했던 것 같다. 또한, 동안이고 피부가 깨끗하여 어려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도 했었다. 스스로 그렇게 말을 하는 게 쑥스럽던지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저녁에 특별한 일정은 없으세요?”
첫날 세미나 일정이 끝나고 미처 자리에 일어나기도 전에 곁에 온 정미가 물었다.
“네. 없습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아서 영진이 가볍게 받아넘기지도 못하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둘은 다른 일행들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로비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괜찮으시다면 서울까지 왔는데 동향끼리 술 한잔 하실까요?”
사실 영진은 당초 “연아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실제 통화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반면 손정미는 앞으로 대산에서 가끔 만날 일도 있을 것이고 서로 협조해야 할 일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인간적인 친분을 쌓아 신뢰를 구축하면 좋을 것이다.
“광장시장 가서 빈대떡 하나 하실래요?”
정미는 생각보다 털털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단추들이 풀어져 셔츠가 좌우로 벌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좋습니다. 그러죠.”
영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미가 먼저 호텔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졸지에 정미의 등 뒤에 대고 대답을 한 셈이다. 정미는 무척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인 듯했다.
둘은 호텔에서 잡아 준 택시를 타고 광장시장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정미의 청치마 속에서 살짝 벌어진 무릎 사이로 하얀 팬티가 보였다. 택시는 30분이 걸려 먹거리 골목 입구에 내려주었다. 둘은 먼저 구경삼아 한 바퀴 휘둘러보고 난 후에 메뉴를 정하기로 했다.
평일 퇴근 시간 전이였지만, 이미 자리 잡고 먹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너르고 긴”이라는 이름 그대로 광장시장에는 비빔밥 재료도 있고 돼지 껍질, 다양한 특수 부위를 비롯해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있는 듯했다. 백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이다.
대기 줄을 피해 자리 잡은 둘은 육회와 빈대떡, 마약 김밥으로 불리는 꼬마 김밥 등 저녁 요기를 할 겸 넉넉하게 주문했다.
처음 하는 술자리라 뻘쭘할 것 같았지만 막걸리 잔을 서로 채워주며 오가는 대화 속에 이내 어색함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손을 잡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미가 먼저 영진에게 제안했다.
“우리 이제 김 다 빠진 콜라 같은 환경 얘기는 그만하고 각자의 연애 얘기를 하죠?”
그나마 환경이 둘이 통하는 요소인데 그것마저 생략하면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드는 영진이다.
“글쎄. 저한테는 어울릴 만한 연애 얘기도 딱히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럼, 와이프 얘기라도 해보세요. 남자분이 스타트해야 제가 덜 부담스럽죠. ok?”
영진이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전에 환경단체 회장이 정미를 소개하며 단체 사무국장 일을 4년 근속했는데 워낙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하고 성격도 좋은 데다 말을 잘해서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라도 꼴까닥 넘어오게 만든다는 말이 괜히 한 말이 아닌 듯했다.
“그쪽 와이프 분은 어떤 분이세요?”
정미가 영진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아..... 전 돌싱이라 연애도 와이프 얘기도 의미가 없을 듯한데....”
영진은 일부러 거짓말할 이유도 없을 듯해 이혼 사실을 얘기했다. 어차피 대산 발전연구원 생활을 계속하는 한 결국 알려지게 될 일이다.
정미는 약간 당황한 듯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죄송해요.... 전 당연히.... 아무튼 정말 미안해요.”
“아뇨. 아뇨.... 정말 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 인걸요.”
영진은 생각보다 더 당황해하고 미안해하는 정미를 일단은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문득 이곳 광장시장 어딘가에서 경윤이 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장의 현란한 불빛 사이로 그녀의 뒷모습이 꿈결 같이 실루엣으로 비친다.
그러나 머릿속에 가득 채워지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이 아닌 여우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아주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우의 모습이다.
“맞아요. 이혼이 뭐 흠인가요. 전 솔직히 부러워요.”
정미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린 영진이다. 상대를 앞에 두고 괜한 딴생각을 했다는 미안함에 자기 잔을 비우고 정미에게 급히 권했다. 막걸리 두 되가 순식간에 달아나고 새로운 주전자에 가득 채워서 다시 나왔다.
시장 한복판 전광시계는 오후 8시 40분이지만 낮 동안의 더위는 이어지고 있었다.
“중년의 반란, 이제 누구의 삶도 아닌 나 자신의 삶을 찾고 싶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닌 대부분 여자들의 생각이 아닐까요?”
정미는 마치 영진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남자들도 아마도 대개 그럴 것 같습니다.”
결혼 생활 8년 차. 이젠 뭘 해도 남편은 시큰둥하기만 해 살아가는 재미도 없단다. 죽도록 쫓아다녀서 결혼해 줬는데 아이 둘 낳고 나니 시들해졌는지 한번 안아주는 것도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지만, 그나마 날을 고르고 고르다가 한번 해주는데 그것도 큰 아량을 베풀 듯이 진행한단다.
애를 낳았다는 이유로 자기한테 둘러 붙어있는 하잘것없는 아줌마로 취급하는 것 같아 그게 싫어서 대학 시절 전공을 살려 이 일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애절한 사랑 천만에....”
아담과 이브는 사과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와 험한 세상으로 나왔고, 남자의 목에 걸려있는 Adam's Apple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혹자는 파릇한 푸른 사과는 인류에게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신의 과일이라고 했다. 다만, 영진은 남자는 함부로 사과를 따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
광장시장에 나온 둘은 호텔 근처까지 택시를 타고 왔다. 호텔 바로 앞까지 이동하려고 했으나 굳이 한잔 더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영진이 대로변에 있는 호프집에 들어가려 할 때 정미는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캔을 먼저 사 왔다. 그리고는 치즈 포, 맥주엔 버터구이 오징어라며 캔을 건네며 건배를 외쳤다.
서울의 밤하늘에도 별빛이 보이지만 시골 한적한 곳에서 바라보는 하늘과는 공기부터 다르다고 생각하며 둘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정미의 입에서는 자꾸 흥얼흥얼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나 음치 맞죠?”
“뭘요. 노래 잘하시는데요.”
영진은 즐거운 기분이 깨질세라 손바닥으로 장단을 맞추며 흥을 돋워 주었다.
“그냥 자신감 가지고 한번 불러본 거예요.”
밤중이라도 바람이 없었다.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단둘이 만난 것은 오늘 처음인데 마치 오래 사귄 연인처럼 느껴져요.”
정미가 얼굴을 가까이 내민 바람에 둘의 얼굴이 부딪칠 듯이 맞닿아 있었다.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영진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웃으며 말했지만, 오늘은 이 여자와 밤새도록 침대에서 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더 빨리 이상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말한 정미는 바로 옆에서 영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힌다. 내일이면 대산으로 내려가야 하는 정미로서는 영진에게 이상하리 만치의 뜨거운 열정을 느끼고 있었다. 멀리 떠나온 여행의 해방감과 자유분방함에서 오는 관념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남편과의 잠자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섹시한 자극으로 다가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랫도리를 젖게 만들고 있다.
“이제 그만 가요~~~~!”
일어서면서 서슴없이 팔짱을 낀다. 순간적으로 물컹거리면서도 탄력 있는 그녀의 젖가슴이 감촉에 닿는다. 영진의 심장이 빠르게 맥박 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데~~~~!” 하고 한마디 하니 젖가슴의 감촉을 더 느껴보라는 듯 자기 가슴 쪽으로 팔을 부여안는다. 둘은 호텔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영진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깊은 입맞춤이 한동안 이어진다.
“우리 같이 씻어. 내가 씻겨주고 싶다.”
정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옷을 남김없이 벗어 버린다. 바람에 금방 날아갈 듯 가녀린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뽀얀 가슴은 제법 풍만했다. 샤워기 물을 온수로 맞추고서는 욕조에 들어가자마자 영진은 애무를 시작했다.
처음 정미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귀에서는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지만 이내 비누 향에 살냄새로 바뀌었다.
영진은 다시 귓바퀴를 물다가 귓불을 핣았다. 앓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번갈아 가며 섞였다. 그러고 보니 정미는 섹스를 무지 즐기는 타입이었다.
더 오래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 절정으로 오르는 시간을 늦추려고 잠깐씩 움직임을 멈추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영진에게 달라붙어 보채기도 했다. 영진은 정미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혔다. 둘 다 젖은 몸을 닦지도 않았다. 호텔 객실 안은 불빛이 환해 반듯이 누운 정미의 전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둘의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졌고 몸의 밀착 정도 또한 더 강해졌다. 영진도 이미 달아올라 있어서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하체는 터질 듯이 곤두서 있었다. 정미가 두 다리를 벌려 자세를 갖췄고 영진의 몸과 합쳐지니 두 팔로 영진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는 격렬하게 반응해오고 있었다. 섹스의 행위에 있어 정미는 행동에 가식이 없는 여자였다.
다음날 먼저 일어난 영진이 침대에서 아직 자고 있는 정미를 깨웠다.
“어. 진짜 시간이 많이 됐네.”
일어나며 영진부터 끌어안고 입술을 비벼대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아침 식사를 위해 미리 옷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는 영진을 보며 정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 세미나에서 뜻하지 않은 큰 수확을 올린 셈이네.
자기는 섹스가 탄소중립 정책에 딱 맞는 거라는 거 알지?”
서로 몸을 섞은 사이가 되었기에 정미의 호칭도 자연스레 자기가 되었으며 은밀하고 뜨거운 웃음을 지을 수 있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방에 올라온 정미는 영진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다시 한번 절정에 올라 도리질을 했다.
그리고 둘은 대산에서도 친구처럼 가끔 만나자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복사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