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들링」 08
내가 공표했을 때 나는 도선주 여사와 예지와 세윤과 함께 전지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던 중이었다. 주말에 다 같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알을 품은 황제펭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은 바깥쪽에 있던 펭귄의 체온이 떨어지면 안쪽에 있던 펭귄과 자리를 바꾸는 식으로 무리 전체가 서로의 위치를 바꿔 가며 한겨울의 추위를 극복하는 황제펭귄의 ‘허들링’을 담은 다큐멘터리였고, 방송이 끝나자마자 세윤이 펭귄을 그리겠다고 졸라댔다. 우리는 못 이기는 척 세윤을 위해 거실에 판을 벌였다. 워낙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는 세윤 덕분에 집에는 늘 미술 도구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세윤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 도구는 크레파스였다. 도선주 여사는 크레파스를 좋아하는 세윤을 볼 때마다 모녀지간 아니랄까 봐 크레파스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나를 겨냥해 놀렸고, 그러면 나는 왜 옛날이야기를 꺼내느냐고 툴툴거리곤 했다. 어쨌든 다들 커다란 전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앉아 힘을 합쳐서 펭귄 무리를 그리는 데 푹 빠져들었다. 나 역시 한참 동안 펭귄의 까만색 날개를 색칠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거실 창으로 따스한 햇빛이 한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그 햇빛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햇빛을 손안에 담아 두려는 듯 그렇게 한참 동안 손을 내밀고 있다가 이내 표명했다. 방송 공부를 다시 하겠다고.
그러자 세윤이 밝은 목소리로 먼저 대답했다.
“공부? 엄마, 나랑 같이 공부하자.”
예지도 대답했다.
“그래, 나 어차피 칼퇴니까 내가 세윤이 픽업할게.”
도선주 여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펭귄만 열심히 그리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답을 듣지 않아도 나는 도선주 여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내가 혼자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언제나 묵묵히 내 손을 잡고 함께 걸어주었던 도선주 여사라면 이번에도 틀림없이 나의 의사를 존중하고 지지해 줄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틀린 선택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스스로 깨우칠 나를 믿고 기다려 줄 것이었다. 나는 어느새 햇빛이 고스란히 담긴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내 옆에 앉아 신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세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세윤은 머리카락을 만져 주자 기분이 좋은 듯 계속 만져 달라고 말했고, 나는 나의 손길을 원하는 세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 마침내 나의 손이 지닌 온기가 도선주 여사의 손이 지닌 온기만큼 제법 따뜻해졌구나,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선택을 직접 내렸고 이제는 보호자를 필요로 하기보다는 보호자가 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