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라는 말은 너무 쉽게 던져졌다 – 자기주도학습의 신화
혼자 힘으로 강을 건너보라는 말
수영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이렇게 말해보자.
'저기 강이 보이지? 우린 강 반대편으로 헤엄쳐 건너가야 해.
네 힘으로 한 번 해봐.'
이미 수영을 배운 아이라면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반대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아이라면 발도 떼지 못하거나, 설령 물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중간에서 힘이 빠져 가라앉을 수 밖에 없다.
너무 쉽게 던져지는 말
요즘 교실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 중 하나는 이것이다.
'자기주도학습이 중요하다.'
'학생 스스로 자신만의 계획 세우고 그에 맞춰 공부할 줄 알아야 한다.'
교사도, 학부모도, 심지어 아이들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아이들이 ‘스스로 하지 못해서’ 문제일까?
우리 학생들은 혼자하는 법을 교육받아 본 경험이 없다.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혼자 하라”는 말로
교육의 책임을 회피해온 것 아닐까?
자기주도는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이다.
혼자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훈련되고, 경험된 사람이 도달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은, 그 결과를 출발점으로 삼으라고 강요한다.
준비없는 자기주도
아이에게 수영을 처음 가르칠 때를 떠올려보자. 누군가 물에 들어가는 법을 알려주고,
발차기와 호흡법을 반복해서 시범 보이며, 아이가 물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곁에서 함께
있어주는 일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물에 들어가보지도 않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 스스로 해봐. 네가 계획을 세우고, 반복해서 연습하면 잘할 수 있어.'
아이는 혼자 던져진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숨이 차고 허우적거리다 결국 포기한다.
지금 자기주도학습이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식이다.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고,
살아남지 못하면 그 책임을 아이에게 돌린다.
출발선이 아니라, 버려진 자리에서 자기 책임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격차를 만드는 구조
실제로 우리의 교육구조는 외부 수영학원에서 최소한,
수영의 기초단계를 마치고 혼자힘으로 변화무쌍한 자연의 물살을 헤쳐가며
강을 건널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아이들만을 환영하는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물과 놀이하며 친해지고,
자신만의 영법을 서서히 발견하며 발전시킬 여유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상위권 학생들은 자신만의 영법으로 유영하며 헤엄쳐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발차기는 커녕 물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채 같은 출발선에 세워진다.
이렇게 출발선부터 다른 아이들에게 동일한 '자기주도'를 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공정하다.
관계속에서 태어나는 자기주도
자기주도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누군가 이끌어주고, 질문을 던져주고,
때로는 의욕 없는 날에도 손을 잡아주는 경험.
그 모든 것이 있어야 가능하다.
아이들은 자기주도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는 환경을 허락받지 못했을 뿐이다.
방향을 잃은 자기주도 학습
자기주도학습이란, 단순히 혼자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방향을 잃지 않고, 스스로 점검하며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애초에 혼자서는 완성될 수 없다.
누군가 옆에서 흐름을 잡아주고,
학습의 전략을 제시하며,
문제가 생기면 즉각 피드백을 제공하는 환경이 있을 때
비로소 자기주도학습은 작동한다.
즉, 공부의 방향이 맞고, 그 흐름이 끊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학습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우리나라의 교육체계에서 특히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학습의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장 중요한 전환점에서 공교육의 준비는 거의 없다.
전적으로 '사교육'에 의존하고 있다.
공교육의 이같은 공백을 수십 년간 사교육이 메워왔고,
결국 자기주도 학습은 사실상 ‘선행학습’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다.
우리는 왜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가?
책임을 떠넘기는 말들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자기주도학습에 대해 소개하고 가르치고 있는가?
교육당국은 이를 교육시킬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는가?
자기주도 학습에 있어 그 방향성은 누가 담보할 것인가?
결국 그 방향성은 누군가의 조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진짜 자기주도학습은 단지 ‘의지’나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의 설계와 구조, 그리고 정서적 기반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정서적 기반과 설계조차 없이 아이들에게 '혼자 하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묻고 싶다.
과연 우리 교육 시스템 속에서 아이들이 자기 생각을 할 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기주도 학습을 강조한다는 말은,
자기주도 학습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구조적으로 버리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과연 우리의 이런 교육 시스템 속에서 자기주도 학습이 가능한 아이들은 몇 퍼센트나 될까?
결국 우리는 아이들을 구조적으로 버리는 교육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지금의 공교육은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게
'스스로 하지 못한 책임'을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지우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시작헤야 하는지?'
'실패해도 괜찮은지'를 가르친 적은 없다.
무엇을 위해서?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상위권의 언어가 된 자기주도
자기주도는 상위권의 언어가 되었다.
오늘날 자기주도학습은 모두에게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계층만이 도달할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부모가 일정한 경제적 자원을 제공하고,
사교육이 계획과 동기를 설계해주는 아이들.
그들에게 자기주도란, 이미 짜여진 커리큘럼을 스스로 선택하고 관리하는
‘관리형 자기주도’일 뿐이다.
반면, 학습 자원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자기주도는 말 그대로 공허한 명령이다.
그들은 계획을 세우는 방법조차 배운 적 없고, 실패를 복구할 기회도 배우지 못했다.
그들에게 자기주도는 현실이 아닌 이상이며, 그 이상은 반복되는 좌절로 되돌아온다.
최근 강조되고 있는 논술형 사고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의 주장을 분석하는 능력은 이제 상위권만의 전유물이 되었다.
논리적 글쓰기, 질문하기, 탐구하기는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의 몫이 되었다.
결국 자기주도와 논술형 사고, 이 두 가지는 오늘날 교육격차를 더욱 고착시키는 계급 언어가 되어버렸다.
공교육은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공교육은 더 이상 ‘알아서 하라’는 무책임한 주문을 반복해선 안 된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네가 스스로 해볼 수 있도록, 우리는 이렇게 도와주겠다.'
그 말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구조이며, 설계여야 한다.
아이에게는 작은 성공을 반복할 기회와 실패를 회복할 수 있는 환경과 관계망이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자기주도'는 자란다.
지금의 교육은 마치 ‘완성형 아이’를 전제로 삼고, 거기에 맞는 등급을 부여하는 체계처럼 작동한다.
교육은 아이를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성장에는 반드시 정서적 기반이 필요하다.
자기주도는 단지 공부 계획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믿는 감정이고, 누군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정서적 확신이다.
그 믿음이 없다면, 혼자 하는 공부는 자기 포기의 다른 이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