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쏘았다>를 보고.
주앙 질베르토(João Gilberto)가 보사노바의 영원한 걸작 < Chega De Saudade >을 녹음했던 1959년 대서양 건너 프랑스에선 장 뤽 고다르가 프렌치 뉴웨이브, 일명 누벨바그의 대표작 < 네 멋대로 해라 >를 찍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사용하는 포르투갈어로 보사노바, 불어로 누벨바그, 영어로 뉴웨이브 모두 “새로운 흐름”이란 같은 의미를 지녔다. 표현 양식에서 영화사 일대 충격을 안겼던 누벨바그처럼 보사노바도 당대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 쥴 앤 짐 >(1962)에 충격받았다는 밀튼 나시멘토의 회고처럼 두 장르간의 교집합과 상호작용도 있었을 테다.
비니시우스 지 모라에스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주앙 질베르토 같은 거인들에 힘입어 브라질에서 시작되었던 보사노바가 형성한 커다란 파도는 철옹성 같은 미국을 집어삼켰고, 콜맨 호킨스와 주트 심스, 덱스터 고든 같은 미국 재즈 대가들이 하나같이 이 브라질산 음악 조류를 수용했다. 영화에서도 아레사 프랭클린이 삼바/보사노바 연주 집단 탐바 트리오와 협연하는 모습이 나온다. 1965년 제 7회 그래미에서 “올해의 음반”을 수상한 스탄 게츠와 주앙 질베르투의 < Getz / Gilberto >와 찰리 버드와 게츠의 콜라보레이션 1962년 작 < Jazz Samba >처럼 미국 아티스트들이 발표한 보사노바가 시대를 대변하는 명반으로 자리매김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전 미국 음악시장을 세차게 흔들었던 브라질 역군들 가운데 이제는 잊혔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천재라고 인정했던 사나이가 있다. 커리어가 끊기지 않고 쭉 이어졌더라면 나라 레앙과 주앙 도나토 같은 위대한 보사노바 아티스트 반열에 올랐을지도 모르지만 급작스런 실종으로 날개를 피지 못한 피아니스트 테노리오 주니오르. 그를 다룬 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가 바로 페르난도 트루에바-하비에르 마리스칼 공동 연출의 <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쏘았다 >다. 미국의 음악 저술가 제프 해리스가 테노리오 주니오르의 흔적을 찾아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를 여행하는 내용을 담았다.
비니시우스 지 모라에스, 안토니오 페치 필류라는 본명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토키뉴와 함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공연을 마치고 새벽에 잠깐 샌드위치를 사러 나간게 지인들이 기억하는 테노리오의 마지막이다. 우루과이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 남미 전지역에 걸친 군사 쿠데타와 독재 정권이 만연한 시기였고 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육군 총사령관 중심의 군부가 일명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테러를 자행했으며 1976년에서 1983년 사이 무려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정치와 무관한 테노리오 주니오르였다.
심지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중남미 5개국에서 좌파-진보세력의 척결을 목표로 일어난 “콘도르 작전”으로 인해 무수한 실종 사건이 일어났으며 “아르헨티나에서 사라진 남매가 우루과이에서 나타났다더라”같은 기이한 사례가 영화 속에서도 언급된다.
영화 후반부엔 클라우디오 발레호스의 증언이 테노리오에 대한 탄압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아우슈비츠와 비견될 만큼 잔혹했던 에스마라는 국가 주도 테러단체에 의해 복면쓴 상태로 총살당했다는 이야기가 가슴을 세차게 내려쳤다. 애시당초 다큐멘터리긴 하지만 음악 영화에서 남미의 엄혹했던 현대사에 그렇게 큰 비중을 할당했다는 데에서 감독의 의중을 읽었다.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1976년 서른넷 나이로 경력이 끊겼으니 세월의 흙먼지에 덮여 자취를 감추었지만 1963년부터 다수의 작품에 참여한 것치곤 참 언급이 드물다. 솔로 리더 작이 1964년 < Embalo >로 유일한 점도 작용할 테다. 하지만 영화 속 유수 대가들의 회고를 돌아보면 테노리오가 얼마나 대단한 예술가였으며 그의 실종이 음악사 얼마나 큰 손실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리듬과 선율 측면에서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그가 피아노 기술 혹은 감정 어느 부분에서 탁월했는지 영상에서 서술되진 않지만 이미 지위가 굳건했던 브라질 거장들이 이십 대 초중반의 테노리오를 음반 작업과 라이브 퍼포먼스 그토록 자주 기용했다는 측면에서 연주자로서 능력이 대단했음이 입증된다.
도리스 몬테이로(Doris Monteiro)(보사노바)와 가우 코스타(Gal Costa)(록/사이키델릭), 에그베르토 지스몬티(Egberto Gismonti)(실험적인 재즈)처럼 같은 브라질 출신이자 스타일이 각기 다른 예술가가 그를 원했다는 점에서 스타일적 다양성이 드러난다. 밀튼 나시멘토의 1975년 MPB(Musica Popular Brasileira 브라질 대중음악) 명작 < Minas >(1975)에서도 테노리오의 크레디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의 작곡 실력이 부족한건 아니다. 유일작 < Embalo >에서 탁월한 선율 주조 능력을 감상할 수 있다. 더욱 많은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분명 멋진 리더 작을 다수 발표했을 테다.
“브라질의 밥 딜런”이라고도 불리며 1960년대 말 브라질 문화예술운동 트로피칼리아를 이끌었던 카에타노 벨로소. 영화에서 두 사람이 기차 타고 상파올로에서 리우로 가는 시시퀀스가 나온다. 보통 카에타노하면 어쿠스틱 기타가 떠오르지만 여기선 반대로 테노리오가 기타를 쥐고 카에타노가 기타선율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린다. 정규적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던을 공부하지 않았던 카에타노는 종종 테노리오에게 코드 진행과 화성을 자문했다고 한다. 결코 이뤄지지 않은 두 사람의 콜라보레이션이 너무나도 아쉽고 궁금하다.
누차 얘기하듯 그의 실종은 안타깝지만, 왠지 모르게 운명적이란 느낌도 든다. 출중한 음악성과 더불어 지인들이 자주 묘사한 그의 특성은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도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잔인하나 그러한 그의 습성이 미스터리어스한 실종과도 운명론적으로 맞닿아 있다. 인간관계도 복잡했는데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던 애인 말레나와 많은 자식을 둔 카르멘 등 여자관계도 복잡해서 인터뷰를 통한 그들과의 일화도 비중이 꽤 높다.
쿨재즈 시대를 줄므 잡았던 미국 알토 색소포니스트 버드 쉥크와 해리스가 산호세의 쉥크 집에서 만난 장면이 나온다. 테노리오의 섬세한 터치를 칭찬하던 쉥크는 테노리오의 실종 사건을 듣고 놀람과 동시에 한동안 침묵에 잠긴다. 직접 운전해서 해리스를 공항에 데려다주면서도 한마디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충격이 컸나 보다. 함께 음악했던 동시대 연주자 몰랐던 사건이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게 당연지사.
https://www.youtube.com/watch?v=NWfdlHY-IVA
버드는 테노리오의 1964년 유일작 < Embalo >의 ‘Sambinha’를 작곡할 만큼 인연이 두터웠다. 여기서 쿨재즈와 보사노바의 친교가 발견된다. 흔히들 미국 재즈 아티스트들이 보사노바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고 맞는 이야기지만 반대로 브라질 뮤지션들도 미국 재즈에, 특히 살랑살랑 이는 미풍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쿨재즈를 사랑했다. 보사노바를 대표하는 싱어 엘리스 헤지나가 쳇 베이커에 푹 빠졌다고 회고하는 장면도 영화에 나온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안경을 쓴 점잖고 곱상한 외모가 빌 에반스와 겹쳐 보인다. 심지어 수염을 기른 모습도. 에반스가 리우로 공연왔을 때 두 사람은 조우했고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재즈 매거진 Jazz with Ascent 의 페르난도 곤잘레즈(Fernando Gonzalez)는 “테노리오 주니오르는 그의 우상인 빌 에반스처럼 간결하고도 밝은 터치와 천부적 선율 감각, 우아한 스윙을 했다”라고 서술했다. 테노리오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리우의 어느 클럽에서 합동 콘서트를 펼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의 엔딩 파트에서 1973년도 MPB 명반 < Quem É Quem >의 주인공 주앙 도나토가 등장한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테노리오가 그에게 헌정한 ‘Viva Donato’를 연주한다. 한동안 도나토의 플레잉을 포착하다가 이내 엔딩 크레딧으로 이동한다. 분명 곱고 아름다운 선율이지만 계속 이어지는 옥타브가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류를 형성하며 가슴을 꿰뚫어왔고 마치 가슴에 남을 보사노바를 들려주었지만 공포 정치로 희생당한 테노리오 인생 요약본같았다.
테노리오 주니오르 사건은 음악 팬들과 동료 및 가족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으나 미국 싱어송라이터 식스토 로드리게즈의 존재를 찾아 나서는 < 서칭 포 슈가맨 >(2012)처럼 <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 >도 잊혀진 예술가의 존재를 다시 꺼내어 재조명했다. 음악가로서 테노리오의 시간은 그리 길지 못 했지만 단 한장의 솔로 음반과 다양한 참여작에서 그의 예술적 숨결과 터치를 남겼다. 브라질 리우의 어느 재즈 클럽에서 섬세하고도 신명나게 'Embalo' 연주하는 그를 머릿속으로나마 그려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wvYwz4R-tl4&list=OLAK5uy_mm4_taIS0DSxxdujMj-MRMIH-a58l9k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