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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 Jun 22. 2022

시댁과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댁과 항상 이렇게 싸우고 사이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딱 한번. 정말 딱 한번 좋을 때가 있었다.


친정엄마가 내가 사는 곳에 오시기 4-5개월  일이다.


내 생각엔 앞으로 내 삶에 큰 변수가 없는 한,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진심으로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은 이상 내가 마음을 열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상 그날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댁과 좋았던 시간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시아버지와의 갈등의 시간 동안 내가 너무 화병에 걸려 힘들어하니 남편이 시댁에 전화를 해서

(그 과정에서 시아버지와 남편은 싸웠지만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시아버지가 울며 겨자 먹기로 나에게 사과 아닌 사과를 했었다. 그가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느낌보다는 아들이 하도 뭐라고 하니 정말 그냥 미안하다 말하고 땡 치자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난 말씀드렸다.


| 며느리 :

"아버님, 사돈 어려우신 줄 아세요. 아버님이 나이도 있으시고 어른이시면 그런 행동은 하시는 거 아니지 않나요? 이전에 그런 게 없으셨다 한 들, 사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주세요. 저희 부모님 아버님이 함부로 대하실 만큼 쉬운 사람들 아니고, 아버님보다 훨씬 경우 있고, 훌륭하신 분들인데 딸 가졌다는 이유로 아버님한테 욕 듣고, 막말 들을 이유 전혀 없으신 분들이에요. 제 부모님한테 직접 사과하시라는 말은 안 할게요. 제 부모님께 두 번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한테도 함부로 욕하시고 막말하시지 마세요. 저는 그런 말들을 들을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조심해 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시아버지는 알겠다 하고 한번 마무리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시댁과 남편 그리고 나는 서로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을 했었다. 나도 시댁에 영통을 걸고 하며 아이도 보여드렸었고, 남편도 전보다는 연락을 자주 했었고, 시아버지도 나와 전화 통화할 때마다


| 시아버지 :

 "우리 며느리 고생하네, 더 이뻐졌네"

하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런 조심스러운 사이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나는 한국에 비자를 변경하러 가야 되는 상황이 생겼었고 아이랑 함께 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남편은 비자 문제로 들어올 수 없었다.


아이를 데려갈까 고민을 했었는데, 우리 아빠가 한 번도 손자를 본 적이 없었기에 거의 3년 만에 아이를 데리고 나 혼자 한국을 갔었다.


그리고 하나 더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다.

그동안 시부모님도 단 한 번도 첫 손주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런 조심스러운 관계라면 내가 조금 마음을 열고 한 번도 못 보셨던 손주를 데리고 시댁에 방문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결혼 전에도 몇 번 얼굴을 뵈었었지만 길어야 하루 이틀 수준이었다. 나는 너무 길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은 5박 6일을 시댁에서 보낼 계획을 했고, 이는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와 나와 서로의 시간을 제대로 가졌던 기간이었다.


나는 한 가지 마음밖에 없었다.

아무리 나에게 함부로 하고 힘들게 했던 사람이라고 한들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처음으로 생긴 손주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할아버지 할머니 내 아이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좋은 추억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진심이었다.


그때 한국은 정말 더운 한 여름이었다. 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하다 오랜만에 들어간 한국은 너무 습했고, 더웠고,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 수 증가로 모든 한국 사람이 마스크 쓰고 예민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때 당시 항상 확진자 수가 두 자릿수였던 한국에 그때 처음 서울에 코로나 확진자 수가 1000명이 넘었다고 뉴스가 한창 나올 때라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예민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5박 6일 동안 나와 아이는 시댁 집에서만 있었다. 여행을 갈 수가 없었다. 장 보러 가는 거 외에 키즈카페, 박물관, 전시관 등 아이가 즐길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못 가고 거의 집 아님 동네 산책이 다였다.


다행히 시댁 어른들은 첫 손자였던 나의 아이를 격하게 좋아해 주셨고 반겨 주셨다. 그리고 나에게도 시아버지가 최대한 조심하려고 노력하시는 게 많이 느껴졌었다. 시아버지는 나에게 형식적인 말 말고는 사적인 말들을 거의 걸지 않으셨다. 나도 그동안 쌓였던 내 감정, 일들 일체 말을 안 했다.


내 목표는 아이와 시부모님이 좋은 추억과 시간을 가지는 거였기에, 괜한 과거 이야기를 들추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아이한테 시아버지의 언성을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제발 무난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5박 6일을 보냈음 하는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 내가 아차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는데


나의 아이는 땅콩 알레르기가 굉장히 심한 아이이다. 아기였을 때 땅콩 성분이 들어간 과자를 한두 개 먹고 얼굴 전체에 알레르기가 올라오고, 식도가 부어올라 아기가 숨도 못 쉬고 큰일 날 뻔했었다. 응급실에 실려갔었는데 그때 정말 나는 아찔 했었다.


의사가 이 아이는 땅콩이나 견과류 섭취 시 *아나필락시스가 올 수 있는 아이라, **에피펜을 항상 구비하고 다녀야 된다고 했었다. 그만큼 내 아이의 견과류 알레르기는 심각했다.


* 아나필락시스란 (아나필락틱 쇼크)는 특정 물질에 대해 몸에서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정 물질을 극소량만 접촉하더라도 전신에 증상이 나타나는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입니다. 주로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납니다.


**에피펜 : 에피펜은 알레르기 반응인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발생했을 때 사용하는 응급치료제.

(상기도 폐쇄로 인한 호흡곤란 증상이 있을 때 허벅지에 주사기 같은 거 꼽아서 응급 처치하는 치료제)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음식이나 과자를 먹일 때 땅콩이나 견과류 확인을 하고 아기를 먹인다.

이는 남편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게 누누이 알려드렸었다. 절대 견과류 땅콩은 아이에게 안된다고 조심해 달라고. 나 또한 그것만 조심해 주시라고 누누이 말했다. 아기가 기도가 부어올라 쇼크사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된다고.


한 번은 집 앞 공원에 시어머니와 나 아이와 시아버지가 있었는데, 시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 시아버지 :

"무슨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 며느리 :

 "아버님 땅콩이나 견과류 들어있는 아이스크림만 안 사 오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아이와 돌아온 시아버지의 비닐봉지 안에는

브X보콘, 월X콘 등 아이스크림 위에 땅콩이 그대로 올라간 아이스크림만 죄다 골라오셨다.


무인 아이스크림가게에 나도 가봤지만,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과일맛 아이스크림은 충분하게 있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에게 말을 한 것인가.. 내 말을, 본인 아들 말은 듣기는 하는 건지...)

땅콩이 한가득 있는 아이스크림


| 며느리 :  

"아버님, 죄송하지만 (아이 이름)에게 절대 그 아이스크림을 주시면 안 돼요."


내 말을 들은 시아버지는 본인 입으로 아이스크림 위에 있는 땅콩을 다 핥아 드셨다. 그리고 크림만 남은  아이스크림 부분을 내 아이에게 건넸다 먹어보라고. 오 마이 갓.


| 며느리 : 아버님, 다시 한번 죄송한데 그건 (아이 이름)이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아버님께서 사 오신 아이스크림 먹이고 싶으신 마음은 알겠는데, (아이 이름)은 잘못하면 기도가 부어 올라서 응급실에 가야 돼요. 땅콩이 있는 음식을 먹으면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오는 아이라 절대 안 될 것 같아요.


시아버지는 막무가내로

| 시아버지 :

"괜찮아 안 죽어 먹어도 돼" 하면서 아이에게 계속 건넸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그걸 계속 먹으려고 했었다.


옆에서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본 시어머니가

| 시어머니 :  

" 00 아빠, 며느리가 안된다고 하잖아. 주면 안 돼. 아기 큰일 난다잖아. 주지 마. 조심해야 돼 우리가."

라고 하시면서 뜯어말리셔서 결국 아이는 그걸 먹지 않았다.


그때 집에 너무 가고 싶었는데, 일단 참았다. 6일만 견디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다음 날 거의 38도 정도 찍었던 점심시간에 어머님이 이X트를 같이 가서 먹을걸 사 오자고 하셔서 난 아이랑 어머님이랑 길을 나섰다. 정말 습하고 더웠었다. 우린 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아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었고 아이가 너무 힘들어했다. 집에서 한 30분을 걸어갔던 것 같다.


아이의 등의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나는 휴대용 선풍기 등을 사용해서 아이 열을 식혔던 기억이 난다.

겨우 도착을 하고 마트에서 땀을 식히고 살걸 사고 있었는데 시아버지가 본인 차를 타고 마트로 잠시 들리셨다.


나는 아 나중에 집에 갈 때는 우리가 짐도 있고, 아이도 있으니 차를 태워 주시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나의 큰 오산이었다.


나와보니 시아버지는 본인이 더워 국수 한 그릇 같이 먹을까 해서 왔다고 하시면서, 시어머니가 우리는 집에 가서 밥을 먹을 거라고 하니 그럼 별 수없지 하면서 본인은 차 타고 친구분이랑 식사를 하시러 간다면서 가셨다.


시어머니는 배낭에 장을 본 물건을 주섬주섬 넣으시고 양손에는 또 물건을 담은 봉투를 바리바리 드셨다.


나는 너무 죄송해서

| 며느리 :

"어머님 주세요 제가 들게요. 가방 주세요. 가는 길 더워요. 저 주세요"  하고 받아서 들려고 했는데


어머님은 아이만 챙기라고 하시면서 또 그 30분 땡볕을 걷기 시작하셨다.


한국의 더위에 지친 2살 반 된 내 아이는 결국 서울 길 위에 대자로 들어누워서 울기 시작했다.

땀이 엄청 났었는데, 나는 아이를 안고 짐을 들고 가는 어머님을 따라 30분을 걸어갔다.


내 기준에서 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들만의 문화거니, 그들이 살아온 삶이 이렇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내가 그들의 삶을 살아보진 않았으니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지 않는가.


그 기간 동안 시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살아오시면서 시어머니가 시아버지랑 살면서 힘드셨던 일들, 본인 시댁 이야기들, 남편 어릴 때 이야기, 시누이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가진 재산이 얼마인지.

내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어머님은 술술 다 이야기를 하셨었다.


나는 그냥 들어주기만 했다. 시어머니의 이런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그동안 많지 않았을 것 같아서. 다 이야기하시라고 들어주고, 같이 공감해주고 같이 위로해줬었다.

심리학에서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경청을 할 때, 공감해주었을 때 상대방이 많은 위로를 받는다고 배웠던 기억이 나서였다.


시어머니도 처음 본인 집에 지내게 된 며느리를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셨으며, 나도 며느리로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때 아님 이럴 기회도 없겠다 싶어 정말 내 나름 최선을 다했고 잘해드렸다. 시아버지께도 나도 서로 예의를 갖추고 지냈다.


우리 다 서로에게 조심했고 이렇게 서로 예를 갖추고 서로 조심하는 관계라면 이젠 좀 괜찮겠다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다 한번, 시어머니랑 아이와 내가 옥상에 올라갔었는데 , 시어머니 오래된 이웃이 옥상에 올라오셨다


| 이웃 :

"아휴 손자 와서 좋겠어. 며느리도 오고."


그러자 시어머니 왈


| 시어머니 :

"그냥 뭐 더워 죽겠는데 주방에서 애네 먹을 하루 삼시 세끼 차리느라 고생이지 뭐. 아휴 귀찮아"

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좀 많이 놀랬었다. 표현을 잘 못하시는 분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분명 여러 번


| 며느리 :

"어머님, 제가 설거지할게요. 하지 마세요.  제가 식사 차리는 거 도와드릴게요. 같이해요. 주방 더우신데 어머님 힘드시니 제가 할게요."


정말 식사할 때마다 계속 말하고 제안하고 했었다.


어머님은 그때마다

| 시어머니 :

"진짜 안 해도 된다. 가만히 있어라. 앉아 있어라. 내 살림 누가 손대는 거 난 싫어한다. 내가 어디에 뭐 있고 다 아니 내가 할게"

라면 정말 진심으로 거절하셨다고 생각했었는데.


더 이상 제가 도와드린다고 하는 건 시어머니가 싫어하는걸 계속 건드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 알겠다고 했던 터였다.


그날, 이웃에게 하는 말은 참 의아했던 것 같다. 나는 시어머니 성격이 약간 앞뒤가 다르신 성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5박 6일의 시간이 끝나고, 내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야 되던 전날 저녁. 어머님이 아버님께,


| 시어머니 :

"00 아빠, 나 쌀통 같은 거 하나 필요해요. 하나 사줘요. 쌀이 좋은데 다 누래 졌어"

라고 말씀하셨고 역시나 시아버지는 전혀 들은 체도 안 했었다.


그땐 내가 돈을 많이 벌 때가 아니라, 용돈을 넉넉하게 드리고 싶었지만 내 사정을 아시기에 받으시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나는 쌀통을 원하신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가 친정 집에 오자마자 쿠X에서 10만 원 넘는 제일 좋은 상품을 주문해서 시댁으로 보내드렸고, 5박 6일 저희 식사도 준비해주시고, 편하게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몇 번을 인사드렸었다.


그리고 그때 봤던 시누이 가족들에게도 시조카가 있었기에, 집에 오자마자 그들에게 15만 원어치 넘는 아이 장난감도 사서 보내드렸다. 감사하다고 봐서 너무 좋았다고 다음에 꼭 다시 보자는 메시지와 함께.


그렇게 우린 잘 지낸 적도 있었다.

아쉽게도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서로에게 좋았던 기억 하나는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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