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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에게 밤샘이란...

by 정작가

전 날 저녁, 촬영을 갔던 피디가 예상보다 늦게 돌아왔다. 출연자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설득하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단다. 겨우겨우 설득해 촬영을 마치니 이 시간이 되었다. 좁은 편집실에 피디와 같이 앉아 촬영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본다. 괜찮은 장면을 모아내고, 인터뷰 쓸 것도 미리 골라낸다. 인서트로 쓸 화면도 체크해 둔다. 피디는 편집에 들어간 새, 편집 구성안을 정리해서 넘긴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야식으로 주문한 떡볶이와 순대가 펼쳐져 있다. 마음속으로 아 이거 먹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어느 순간, 열심히 입으로 넣고 있는 내가 있다. 배가 부르니 졸리다. 어차피 밤샐 테니 잠깐 눈 좀 붙여도 괜찮을 듯싶다. 책상에 엎드려 10분 남짓 쪽잠을 청한다.

그날 밤, 새벽 2시가 넘어 가까스로 편집이 끝났다. 나 혼자 편집실에 들어가 노트북을 열고 원고를 쓸 차례다. 전날 오후부터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를 엄청 마신 탓일까, 머리가 몽롱하다. 깊은 밤이지만 사무실은 환하고 사람들은 분주하다. 밤새는 자들이 뿜어내는 기운 때문에 사무실 공기는 탁하다. 안 되겠다. 다시 커피 한 잔을 내리고, 기지개 한번 펴고, 노트북 자판을 힘차게 두드린다. 원고를 쓰면서도 흘끗흘끗 시계를 본다. 어떻게든 생방 2시간 전까지는 원고를 끝내야 한다.

생방송 두 시간 전, 겨우겨우 쓴 원고를 피디에게 던져주고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본다. 질끈 묶은 고무줄 사이로 삐죽삐죽 나온 머리카락, 야식을 먹어 퉁퉁 부은 얼굴, 책상 위에 잠시 엎드려 자는 동안 얼굴에 생긴 자국.. 하아, 난감하다. 조금 있으면 출연자들이 올 텐데 이 몰골로 대할 수는 없다. 팩트로 열심히 얼굴을 두드려 본다. 화장이 잘 먹힐 리가.. 군데군데 붕 뜬 걸 만회하기 위해 립스틱을 열심히 발라보지만 입술만 동동 뜬다.

생방송 한 시간 전, 마침내 최종 원고가 나왔다. 출연자와 제작진 숫자만큼 원고를 출력하고 복사해야 한다. 어, 그런데 복사기가 이상하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잘됐는데, 계속해서 종이가 걸린다. 안 되겠다. 원고를 들고 아래 예능국으로 뛰어간다. ‘토너 부족’이란 종이가 떡 하니 붙어있다. 이번에는 라디오국이다. 역시 종이가 또 걸린다. 속이 까맣게 타오른다. 마지막이다. 1층 노조 사무실로 뛰어간다. “복사기 좀 쓸게요!!” 무작정 이렇게 말하고 복사를 시작한다. 마침내 20부의 방송 원고가 다 나온다.

이것은 꿈도, 상상도 아니다. 내가 밤새면서 겪었던 일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참 많은 날밤을 샜다. 연차가 오래되면 밤을 안 새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밤을 새우고, 집에 들어가서 잠 좀 잔 후 오후에 나와 또 밤샘하는 프로그램을 했다. 3일 연속 집에도 안 들어가는 날이면 머리를 못 감아 내내 묶고 있고, 편의점에서 속옷과 양말은 해결했다.

“이 나이에 이게 무슨 짓이람.” “내가 다시 밤새는 프로그램을 하면 사람이 아니다.” 밤을 새울 때마다 늘 이렇게 외쳤다. 그러면서도 방송이 잘 나가고, 시청률도 잘 나오고, 반응도 좋으면 밤샘의 고단함을 잊어버렸다. 잠깐 다른 일을 하느라 방송을 쉰 적이 있었다. 그 일이 끝나고 아침 생방송을 하자는 피디의 연락이 왔다. 두말 않고 냉큼 하겠다고 했다. 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작가였다.

“낮에는 뭐 하다 밤에 일하는 거야?” 제작 일정이 여유로운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섭외, 촬영, 편집이 일사천리로만 되면 당연히 밤새지 않아도 된다. 섭외가 예정일보다 늦게 가까스로 되기도 하고, 촬영을 갔는데 현지 사정이 예상과 다르기도 하고, 막상 찍어온 촬영본이 건질 게 없으면 편집도 더디게 된다. 그래도 방송은 나가야 하니,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하는 것이다.

서소문에서 일했을 때 아침 생방송이 끝나면 제작팀 모두 기찻길 건너편 언덕에 있는 돼지국밥집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밤을 새우고 방송이 제대로 나갔을 때의 후련, 이제 집에 가서 푹 잘 수 있겠다는 안도, 나 열심히 잘 잘하고 있구나 하는 대견... 밤샘 후 느끼는 이런 감정들이 밤샘을 견디게 해 주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작가에게 밤샘이란... 어쩔 수 없다면 해야 하는 것이지만, 끝까지 친해지고 싶지도 않고 친하지도 않은 웬수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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