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00야!” 처음 작가가 되었을 때 나는 참 어렸다. 막 학교를 졸업한 터라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작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방송을 직접 하면서 배워 나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처음 하는 사회생활이니 늘 좌충우돌이었다. 그런 나를 이끌어 준 건 매일매일 얼굴을 맞대는 피디들이었다. 게다가 피디 한 명에 작가 한 명 이렇게 한 팀을 이뤘으니 둘의 호흡도 엄청 중요했다. 당연히 스스럼없이 피디들을 선배로 불렀고, 피디들은 내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이렇게 부르지 않는다. 작가님, 피디님 하면서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서 평 피디였던 선배들은 자리가 올라가며 차장이 되었고 부장, 부국장, 국장... 이렇게 위를 향해 올라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사장이 되어 버린 선배 피디들도 생겨났다.
심지어 막 입사해서 내가 하는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함께 일하며 가르치던 후배 피디들도 어느새 고참 피디들이 되었다. 예전에는 이름도 막 불렀건만, 이젠 부장, 국장이 되어 함부로 이름을 불렀다간 눈총 받을 지경이 되었다. 무엇보다 어느 순간, 그들이 나의 상사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왕 작가님!”,“0 국장님!”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작가였다. 운 좋게도 공채 시험을 통해 단 한 번도 막내나 서브 작가를 하지 않고 처음부터 메인 작가였지만, 그래도 작가였다. 어느 방송국을 가도, 어느 제작사를 가도 고참 이긴 했지만, 그래도 작가였다. 더러 농담으로 왕 작가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들을 때마다 그리 기분이 좋진 않다. 말이 왕 작가지, 하는 일은 팀의 온갖 잡무를 다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하는 일은 처음 작가를 시작했을 때보다 더 많아졌고, 나의 위치도 똑같고, 심지어 작가료도 30년 전과 그게 다르지 않다. (인플레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낮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아직까지도 계속하고 있는 이유, 평생 해왔던 일이고, 할 수 있는 게 이뿐이고, 가진 재주도 방송 글 쓰는 것뿐이라 그렇다. 여기에 아직도 방송이 좋고 재밌어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승진도 없고, 높은 자리에 앉을 일도 없고, 난초 화분 받을 일도 없고, 팀원들 뒤치다꺼리하면서 평생 작가로 남겠지만... 이게 내 팔자니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