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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에겐 없는 것, 정년

by 정작가 Aug 22. 2023

"그때는 서른 넘은 여자 가수가 없었지.”
<환불원정대>란 프로그램에 출연한 엄정화의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정화는 1992년 영화 <결혼 이야기>로 데뷔했으니 나와 비슷하게 시작한 셈이다. 여자 댄스 가수에 공감한 게 아니라 ‘그때는 서른 넘은 작가도 별로 없었다.’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학교를 막 졸업하고 엠본부 작가로 들어갔을 때, 아무리 큰 프로그램도 작가 수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메인 작가가 있고, 서브 작가는 많아야 둘 정도였다. 내가 처음 시작했던 아침 방송도 각 요일 별로 작가가 한 명씩 있었을 뿐이었다. 작가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거의 다 미혼이었다. 학교를 막 졸업한 내게는 20대 후반인 선배 작가 언니들조차 엄청 대단해 보였다. 대신 어느 프로그램을 봐도 30대 중반 이후 작가는 드물었다. 결혼이나 출산을 하면 그만두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기조차 했다. 그나마 예능 작가들은 나이나 연차가 높은 ‘여자’ 선배들이 있었지만, 교양에선 그리 많지 않았다. 작가들이 조기 은퇴하는 것이 합당한 이유가 없이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우리 옆 부서는 시사 다큐멘터리 팀이었는데, 당시 <인간시대>, <PD수첩>, <여론광장> 등 쟁쟁한 프로그램들이 포진해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프로그램 메인 작가 선배들에겐 감히 말을 건네기도 힘들었다. 당연히 선배들의 나이는 몰랐고, 대충 엄청 많을 것이라고 추측만 했다. 그러다 가끔 선배들이 말 한번 건네면 얼마나 설레고 기뻤는지... 그 당시 교양 제작국의 최고 작가는 박명성 선생님이었다. 같은 작가였지만 한 번도 ‘선배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늘 ‘선생님’이라 불렀다. 박명성 작가님은 멀리서 봐도 카리스마가 막 뿜어져 나왔다. 그 넓은 사무실에서 피디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존경스러웠다. 내 기억에 박명성 작가님은 중후한 장년의 연륜과 경험으로 단단히 채워진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관련 기사를 찾아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박명성 작가님을 처음 뵈었을 때 그분의 나이는 43살이었다. 그리고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나이는 46살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보다도 더 어렸다.

어느 순간, 어딜 가도 나는 나이가 꽤 많은, 경력도 꽤 많은 작가가 되었다. 후배 작가들과의 나이 터울이 점점 커지더니 드디어 이모뻘 선배가 되어가고 있다. 제일 당혹스러운 건 후배들과의 수다 시간이다. “나 때는~”으로 시작해 “니들이 알기나 해?” 이런 꼰대 발언도 하고, “그게 뭐야?” 요즘 유행하는 것들에선 콱 막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심지어 어떤 날은 혼자서 떠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선  내 스스로조차 '그 입 좀 다물라'라고 속으로 외쳐 댄다. 후배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나이 차만큼 커지고 있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늘 은퇴를 생각한다. 참신한 아이디어도 못 내는 것 같고, 감각도 떨어지는 것 같고, 체력도 달리는 것 같고, 무엇보다 제작팀이 나이 든 작가와 일하려니 부담스럽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러다 후배들이 가끔 건네는 말 한마디에 감동받는다. “선배가 버텨줘야 우리도 오래오래 일할 수 있어요” 이게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후배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마운 일이다. 아직도 나 역시 일을 하다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선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내가 그런 선배가 된다면 참으로 괜찮아 보일 것 같다.

방송 작가에겐 정년은 없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은퇴를 할 수도 있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지금, 나는 아직 현장에 서 있다. 굵직한 대표 프로그램도 없고, 유명한 방송 작가도 아니지만, 대신 ‘얇고 길게 가는’ 작가, 그게 나다. 이왕이면 환갑도 현장에서 맞고 싶은데.. 너무 큰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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