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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의 글쓰기, 속도

by 정작가 Sep 11. 2023

는 빨리 걷는다. 어딜 가든 앞서 걷는 편이다.
나는 빨리 먹는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후루룩 먹는다.
나는 빨리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을 잊어버리기 전에 후다닥 뱉는다.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 방송사는 남자들이 훨씬 많았다. 남자들의 속도에 맞추다 보니 빨라졌다고 둘러댄다.
“그렇다면 방송 일도 빠르게 해?” 실은 그런 편이다. 섭외도 미리 하고, 구성도 빨리 하고, 원고도 빨리 쓴다. 빠르게 쓰다 보니 오해도 많이 받았다.
  

“너, 벌써 다 쓴 거야?” 다 쓴 원고를 출력하는데 때마침 자리에 있던 선배 작가가 묻는데 못 미더워하는 말투가 영 기분 나쁘다. 한 때 VJ들이 6mm 카메라로 찍은 영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 인기였었다. 나도 그즈음, 그런 프로그램 중 하나를 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방송에 15분 남짓한 3,4개의 아이템으로 채워졌다. 이런 프로그램은 메인 작가와 후배 작가들이 아닌, 피디-작가 이렇게 한 팀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굴러갔다. 아이템 정하는 것부터 촬영까지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VJ나 피디들이 완성된 편집본을 주는 시간은 항상 촉박했으니 당연히 밤샘은 일상이었다. 당시 내가 일하던 곳은 지상파 방송사에서 시사 다큐로 이름을 날리던 제작팀들이 만든 외주 제작사였다. 그런 만큼 다들 자부심이 높았다.
그날도 세 팀 피디들이 비슷하게 편집을 끝냈다. 이제부터 작가의 시간이다. 피디들이 물러간 편집실에 세 작가들이 각자 노트북을 들고 원고를 쓰러 들어간다. “오~ 예!!” 내가 제일 먼저 편집실에서 나온다. 옆방에선 다른 팀 작가들의 노트북 두드리는 소리가 여전히 나고 있다. 피디에게 원고를 보여주고 신나는 마음으로 원고를 출력하는데, 선배의 말 한마디에 열이 확 오른다. 빨리 쓴다고 대충 쓰는 게 아닌데 이게 뭐지 싶다. 시사 다큐는 호흡이 깊은 만큼 원고 쓰는 시간도 꽤 걸린다. 다들 그렇게 만들었으니 나의 원고 쓰기 방식에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원고를 천천히 쓴다고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개인의 차이일 뿐이다. 작가들마다 원고 쓰는 속도가 다 다르다. 나처럼 빠른 작가도 있고, 천천히 쓰는 작가도 있다. 나도 처음부터 빨랐던 건 아니다.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아침 생방송과 뉴스를 하다 보니 빨리 쓰는 것부터 익혀야 했다. 방송에서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건 최악이다. 생방송이건 녹화이건 제 때 원고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대형 사고다. 엠 본부 시절, 제대로 된 복사기를 찾아 전 층을 뛰어다닌 건 방송 시간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방송 원고를 쓸 때는 속도가 아닌 원고 마감 시간이 더 중요하다.

오늘도 생방송이 나가는 동안 부조 뒤편에 앉아 내일 발제할 사건사고를 모아둔다. 다음 날 방송할 것이라 가정하고,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해 보고, 또 영상이나 싱크가 있는지 확인해 둔다. 이미 내 머리는 내일 방송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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