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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방송

by 정작가 Aug 23. 2023

이제는 내가 했었던 방송들이 모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같이 일했던 피디와 작가들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같이 웃고, 지지고 볶고, 울며 싸우고.. 그런 흔적들조차 희미하다. 나이가 더 먹게 되면 내 기억에 남아있는 ‘나의 프로그램’은 얼마나 될까?

아주 오래오래됐지만 아직도 내게 또렷하게 남아있는 방송이 있다. 나의 첫 방송이다. 엠본부 들어가서 한 달 정도 여러 프로그램을 돌아다니며 연수를 받았다. 연수가 끝날 무렵, 과연 어느 프로그램을 하게 될지 두근거렸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정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됐다. 내게 주어진 첫 프로그램은 소설가 김홍신 선생님과 방송인 송도순 선생님이 진행하던 아침 토크쇼였다. 그냥 아침 토크쇼가 아니었다. ‘주부’ 대상 방송! 학교를 막 졸업하고 사회 경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내게 주부의 마음을 꿰뚫고 공감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라니... 내가 오기 전 미리 잡힌 주제는 ‘태아 교육’. 주부에서 한 방 맞고, 태아에서 더 큰 한 방을 맞았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다. 엠본부 안에 있던 도서실은 작가들의 작은 아지트였다. 여기서 우리는 신문과 무수한 잡지들을 보며 아이템을 찾고, 출연자를 발굴해 내고, 구성을 고민했다. 주부들의 세계가 너무나 먼 낯선 곳이었던 나의 대본은 짜깁기된 온갖 자료들로 채워졌다. 그것조차 내겐 힘든 영역이었다.

첫 방송을 앞두고 며칠 고민 끝에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없다는 건, 컴퓨터도 없다는 것. 회사 대본 포맷에 맞춘 A4 용지에 손으로 한 줄 한 줄 채워갔다. 행여 실수라도 하면 수정액으로 수정하거나, 아예 다른 종이 위에 수정안을 써서 잘라 붙였다. 플러스펜, 수정액, 자.. 이 셋은 작가들 가방의 필수품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피디에게 초고를 건넸다. 내 원고를 읽는 피디 선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담배 한 대를 태워 문다. (그때는 사무실에서 흡연이 허용됐다는!!) 빨간 펜을 든다. 내 대본 위를 좍좍 긋는다. 옆에 뭔가를 써 내려간다. 나를 부른다. “이렇게 수정해라.” 내 플러스펜은 분명 검은색이었는데, 검은색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 빨간색 투성이다. 내 얼굴도 덩달아서 붉게 물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원고를 수정했고, 수정 원고 역시 또 고쳤고, 무사히 첫 방송이 나갔다. 첫 방송을 지켜보면서 나의 것이 아닌 피디의 원고로 방송한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그보다는 내가 이제 방송작가가 됐구나 하는 기쁨이 차올랐다. 그 후로 난 한참 동안 이 프로그램을 했다.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던 나의 첫 방송 원고도, 작가가 됐다는 기쁨에 홀로 걸어서 마포대교를 걸었던 첫 방송 날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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