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그 방송, 영화프로그램

영화를 알지도 못하면서, 두 번째

by 정작가

얌규는 어릴 때부터 말 그대로 공부를 참 잘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얌규는 그렇게 잘해?”

“쟤가 얌규를 가졌을 때 퀴즈 프로그램을 했거든.”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대신 이렇게 답한다.

맞다. 난 얌규가 배 속에 있었을 때 매일 방송을 위해 영화를 보고, 문제를 만드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DCN의 <시네 매거진>이 막을 내리면서 나는 새롭게 생긴 캐치온의 <퀴즈 시네마 31>로 넘어갔다. 처음 만들어진 게 96년. PC통신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특히 영퀴방은 재야의 영화 고수들이 다 모여 있었다. 초성 만으로도 찰떡같이 맞추는 건 기본이었고, 관련 영화들에서 풀어놓는 입담들은 영화평론가 이상이었다. 이 영퀴방에 아이디어를 얻어 영화 퀴즈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진행은 개그맨 윤정수. 영화 퀴즈 진행을 개그맨이 하다니... 이유는 그저 하나다. 출연료. 인지도에 비해 출연료가 적당했기 때문에 진행석에 앉힌 거다. 작가도 나와 후배, 그리고 자문을 위해 영화평론가 홍성남 이렇게 셋이었다. 오랜 투병 끝에 하늘로 간 홍성남 님. 늘 조심스럽고 수줍어하던 그는 내가 짓궂은 장난을 쳐도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그가 있었기에 깊고 풍성한 영화 지식으로 채워진 문제들을 만들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영화 전문 채널에서 하는 퀴즈 프로그램인지라, 난이도가 있는 문제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1930년대 코미디 영화를 이끈 감독으로 프랭크 카프라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카프라와 함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디즈 씨, 도시에 가다> 등의 각본을 쓴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답: 로버트 리스킨)” 뭐, 이 정도 퀴즈가 평균이었으니 당연히 공부도 많이 해야 했다.


쉽지 않은 건 매주 3팀씩 출연해야 한다는 것. 연승을 하면 해외여행 상품권을 주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신청자가 많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는 지인을 출연시키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어쨌든 무료 채널도 아닌 유료 채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영화 퀴즈라니, 지금 생각해도 참 무모한 도전이었다.


‘퀴즈 영화탐험은 1997년 3월 8일부터 2001년 11월 3일까지 방송되었던 MBC 퀴즈 프로그램이다. 4명의 출연자가 대결하며, 부저 누르기와 쓰기 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인형을 가진 사람이 우승한다. 2000년 초반까지 인형을 점수로 했지만 2000년 중반부터 6개의 불로 점수를 측정했다.’ 위키피디아에 나온 프로그램 설명이다. 토요일 오전에 자리 잡고 앉아 꽤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던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작가가 나다. 기획에 들어갈 무렵, 내 배 속에는 얌규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임신 기간 내내 남들은 태교다 뭐다 한다는데 나는 일하느라 정신없었다. 심지어 만삭 때까지 시사회를 열심히 다녔다. 아직도 남아있는 기억 하나, 배는 산처럼 불렀는데, 그 몸으로 신작 공포영화 시사회를 보러 갔다. <큐어>였나, <이벤트 호라이즌>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깜짝 놀란 눈으로 맞아주던 홍보사 직원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작가님, 괜찮겠어요? 이 영화, 임산부가 보기에 좀 그럴 텐데...” “아, 괜찮아요. 이거 보면 아기의 담력도 좀 세지지 않을까요?” 중간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왔다.


<퀴즈 영화 탐험>은 이재용 아나운서와 영화 <코르셋>으로 데뷔한 이혜은 배우의 진행으로 시작했다. 지난 원고를 보니 첫 출연자들이 ‘양택조, 원미연, 이석준, 벅’이다. <퀴즈 시네마 31>보다 난이도는 훨씬 낮았고, 영화 자료들을 아주 많이 내보냈다. 지금에야 저작권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영화 영상이 한정적이지만, 그때는 아무런 구애 없이 실컷 쓸 수 있었다. 프로그램 하이라이트는 초대 손님이 나와서 자신의 영화를 직접 소개하고 문제를 내는 ‘언제나 영화처럼’이란 코너였다. 첫 회엔 장미희가 나와서 <겨울 여자>로 문제를 냈다. 배우 인터뷰 하나 하는 것도 거의 읍소하다시피 해야 하고, 영화 자료를 짧게라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요즘과는 참 달랐던 시절이다.


<퀴즈 영화 탐험>은 기획부터 제작까지 처음부터 함께 한 프로그램이라 애착을 많이 가졌다. 아쉽게도 얌규의 출산을 2주 앞두고 나는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프리랜서 작가에겐 출산 휴가란 있을 수 없는 일. 마음은 몹시 쓰라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얌규를 낳은 지 정확히 삼칠일(3.7일) 만에 나는 다른 영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keyword
이전 11화나의 그 방송, 영화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