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반장>을 일 년만 더 하면 10년을 채운다. 작가로 10여 년은 보따리장수처럼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을 하며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나머지 10년은 공중파에서 케이블까지, 종합 구성물에서 다큐멘터리까지 온갖 영화 프로그램을 했다.
영화를 보고 즐길 줄만 알았지 방송으로 다뤄본 적이 없던 내게 처음으로 다가온 영화 프로그램은 DCN(대우시네마네트워크)의 <시네 매거진>이었다. 제작사는 마포에 있던 서울 텔레콤이었는데 이곳은 이미 <출발! 비디오 여행>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서울 텔레콤도 많은 방송을 제작하고 있었다. 나중에 방송과 영화 현장에서 여기 출신 피디들을 꽤 많이 만날 정도로 제작팀도 많았다. <시네 매거진>은 초대석, 촬영 현장 탐방, 영화계 이슈 점검 등등 전형적인 종합 구성물이었다. 배우 염정아가 진행을 맡았는데 이때 인연이 한동안 다른 일로 이어졌다. 어쨌든 그녀는 <테러리스트> 출연한 후에 영화를 하지 않았는데 “언니, 나 영화하고 싶긴 한데 자신이 없네.” 란 말을 종종 했었다.
90년대 중반, 한국 영화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여러 색깔의 외화들까지 수입되었고, 게다가 홍보 자료 영상인 EPK는 항상 제일 먼저 <출발 비디오 여행>에게 와서 우리 프로그램도 그 덕을 보았다. 그런데 원고를 쓸 때마다 2% 부족한 뭔 가가 채워지지 않았다.
“봉희야, EPK만으로도 원고는 쓸 수 있는데 뭔가 좀 아쉽네. 깊이도 없고 질문도 너무 뻔하지?” “선배, 그럼 우리 시사회 가볼까요?” “시사회?” “개봉 전에 기자들이랑 영화 배급사 사람들이 모여서 보는 건데, 가도 되냐고 물어볼게요.”
나의 첫 시사회의 시작이었다. 홍보사는 우리들의 참석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대한 극장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에 자리 잡은 아주 작은 ‘길 시사실’. 처음으로 시사란 걸 만끽한 곳이다. 사실 그때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좁은 공간과 탁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기로 채워졌던 분위기만 아련하게 기억날 뿐이다.
그 후로도 정말 열심히 시사회를 다녔다. 하루에 3번씩 다니기도 했다. 지금이야 기자 시사도 사전 예약하고, 큰 극장에서 하지만, 그때만 해도 작게 열렸다. 길 시사실 아니면 남산 감독협회 시사실, 거의 둘 중 하나였다. 저녁에 열리는 관객 시사는 종로 1가에 있던 코아아트홀에서 자주 열렸고, 나중에 좀 큰 시사가 열린다 싶으면 역시 종로에 있던 시네코아에서 열렸다. 무엇보다 홍보사나 영화 담당 기자들은 영화 프로그램 작가가 시사회에 온다는 걸 신기하게 여겼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시네 매거진>에는 신인 감독들이나 배우도 종종 출연하곤 했는데 홍보자료가 아닌 전편을 다 보고 나니 인터뷰 질문도 더 잘 써졌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원작으로 했던 <유리>를 보고 실망했지만 주연 배우 연기에 빠져 인터뷰를 밀어붙였던 박신양 배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시사를 보고 나자마자 팬의 심정으로 그날부터 시작해서 몇 날 며칠 함께 술 마셨고, 늘 술자리 마지막은 항상 인사동 ‘소설’에서 끝냈던 홍상수 감독... 다 <시네 매거진>이 맺어준 인연이다. 이 즈음 맺은 가장 소중한 인연은 이지훈 기자다. 이지훈은 유학을 준비하면서 <출발! 비디오여행> 객원 작가로 일하고 있었다. 같은 제작사에서 일했지만 출근하는 요일과 시간이 달라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단지, 서로의 존재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다. “취향이 상당히 비슷해”, “둘이 의외로 잘 맞을 것 같은데” 주변에서 하도 이런 말을 하니 안 되겠다 싶어 우리는 아예 날짜를 박았다. 시사회 끝나고 무조건 보자! 그렇게 해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교집합 거리들이 쏟아졌고, 인생 친구가 될 것이란 직감이 팍 들었고, 둘이 엄청나게,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그렇게 해서 지훈이는 지금까지 내 마음속의 영원한 남사친으로 남았다.
<시네 매거진>은 케이블에서만 하는 작은 방송이었지만, 덕분에 영화 프로그램 작가로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내겐 몹시 고마운 프로그램이었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