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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 Oct 20. 2024

고리 9.

9     




 떼처럼 몰려 들어온 불행은 다행히도 나를 스쳐 지나갔고 다시 평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여름은 분명하게도 하루하루 옆으로 더 옆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가을은 여름이 밀려난 자리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메우고 있었다. 햇빛은 점점 눈에 담을 만해졌다. 하늘을 바라보는 데 있어 기울기가 변화했음을 햇빛의 강도로 알 수 있었다. 거리에 떨어진 나뭇잎 수는 늘어나고 있었다. 바람의 결은 더욱더 변화하고 있었다. 가을답게. 가을을 담은 바람은 옷을 조금씩 여미게 만들었다. 곳곳의 사람들은 간절기에 따른 복장의 변화가 있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봄에 마지막으로 입었던 긴팔 셔츠도 종종 꺼내 입게 되었다. 보관 박스 안에 몇 달 동안 있었다고 꽤 묵은 향이 났다. 그런 묵은 향이 날 때면 나는 할머니를 생각한다. 천안에 계시던 할머니 집. 할머니 집 곳곳에서 진한 묵은 향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옷장을 열면 진한 나프탈렌 묵은 향. 화장실에선 오래된 목재와 목재가 머금은 습기의 묵은 향. 옆집의 외양간에서는 지푸라기 묵은 향. 그리고 할머니가 요리를  할 때 즈음 열리는 뒷마당 장독대에 오래도록 담겨온 고추장 된장 간장 묵은 향까지. 그래서 나는 묵은 향을 좋아한다. 할머니가 생각나서 그런지 그때의 할머니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인지 이렇게 계절이 변화할 때 옷을 더 입어야 해서 조금이라도 물건들이 한정된 공간에서 시간을 묵게 되면서 나는 그런 향을 나는 좋아했다. 문득 일산에 모셔져 있는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참 좋아하셨는데. 나를. 나도 할머니를 그만큼이나 좋아했었다. 이제는 할머니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종종 미어져 오는 느낌을 받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흘러 꽤 무뎌졌다. 가슴에도 상처가 생기고 상처에 덧살이 생기면서 딱지가 생기고 딱지가 떼어지면서 또 아프기도 하고 피도 나고 그러면서 상처가 아물어 가면서 무뎌지는 것일까. 마음에도 상처가 생긴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상처는 성장을 이룬다고 하지만 상처는 상처인 것 같다. 상처는 결국 아픈 것이다. 그렇게 그런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불행에 가까운 일들을 누구보다도 마음에 품고 사는지 모른다. 웃었던 적이 언제인지도,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제는 정의하지 못할 만큼 나에게 오히려 불행이 친밀하게 느껴진다. 불행이 나에게 덮치듯 밀려왔지만 그마저도 겪어본 고통이라 그런지 상처들도 크게 생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너무 큰 상처들이 많아서 고통의 역치가 높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사는 것도 뭐 나쁘지 않다고 느끼곤 한다. 마음이 무뎌진 채 사는 것. 가끔 그런 나를 스스로 바라볼 때가 가장 무섭다. 내가 나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 슬픔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다. 그런 경험도 많이 해보았지만 이 부분만큼은 어쩔 수 없는 절대적 고통의 영역이다. 그래서 그저 살아가는  방법 밖에 없다. 고통이 있어도 잠기는 감정 속에서 살아가도 계속해서 할 일을 하고 앞으로 헤엄쳐 나가는 수밖에 없다. 나의 그림자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항상 같은 시간에 잤다. 그리고 일어나서 바로 양치와 세수를 하고 길어진 머리를 빗질하고 출근에 필요한 옷을 정성스레 골랐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바깥을 한 시간의 절반을 뛰고 깨끗이 샤워를 했으며 맥주 한 캔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자는 것까지 동일하게 살아갔다. 그래야 나를 쫓아와 잠식시키려는 슬픔에 내가 조금이라도 저항하고 대항할 수 있었다.      


 여느 같은 날이었다. 아침 일곱 시가 되면 핸드폰의 알람 울린다. 고통 속에서 나를 바로잡은 후부터는 기상이 점점 쉽게 느껴진다. 단순하게 몸을 더 누위지 않으면 기상이 가능해짐을 알고 알람을 왼손으로 끔과 동시에 일곱 시간 정도 잠들어 굳은 몸을 억지로 앉힌다. 그리곤 억지로 발을 딛고 어쨌든 서 버린다. 그럼 하루의 시작은 말끔하게 시작할 수 있다. 나의 파란색 칫솔에 짠맛이 나는 하얀색 치약을 새끼손톱만큼 짜 올려 양치를 시작한다. 그리 신중하지 않아도 되는 기상 후 양치는 사실 양치의 목적보다는 삶을 굴러가게 만드는 첫 단추다. 그래서 꼼꼼히 한다기보다는 잠을 깨우려 왼쪽오른쪽 얼굴의 신경을 자극한단 느낌으로 뇌를 깨운다. 그러곤 정성스럽게 피부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미온수로 얼굴을 적시고 손가락을 벌려 머리카락을 조금 정리하고 쉐이빙폼과 면도날을 이용해 밤새 고루 자란 수염도 깨끗하게 정리한다. 깨끗하게 정리된 내 모습을 거울로 보고 있으면 그래도 하루를 살아갈 힘이 조금 난다. 얼굴정돈 후 물기를 말끔하게 제거한 뒤 오크향이 나는 애프터쉐이브를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턱과 인중부위에 뿌리고 말려준 다음 로션을 가지런히 발랐다. 아침엔 단순하게 먹는 것이 좋다. 전날 사둔 사워도우에 양상추와 디종 머스터드 케첩 수제햄과 슬라이스 치즈를 넣곤 우걱우걱 먹기만 한다. 먹는 것에 집중한다. 따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씻고 먹는다. 그게 중요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곤 별 볼일 없는 직장으로 작업을 하기 위해 대충 가볍고 몸을 조이지 않는 옷을 걸치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빌라 정문을 나서는 순간 어느 한 어린 남자아이를 만났다. 집에 자주 나가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자주 보던 아이들과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편이다. 그마저도 두 명 언저리지만 말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아이였다. 가늠하자면 대략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부모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아이는 혼자 빌라 정문 유리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자동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시선이 궁금했던 적이 아니고 직감적으로 동물적으로 반사적으로 동일한 행동을 한 것이다. 궁금하지 않았고 의문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나도 올려다보았을 뿐. 하늘에는 파아란 하늘색만이 가득했다. 짙다기 보단 파스텔톤에 가까운 하늘. 아이는 하늘의 어느 중심점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아이 만이 삼을 수 있는 중심점. 뚫릴 듯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아이는 내가 나온 것을 보곤 하늘에서 시선을 거둔 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도 역시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곤 아이를 바로 보았다. 시선의 높이 격차가 있었지만 오히려 내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아이의 눈엔 하늘의 깊이처럼 깊은 깊이가 보였다. 그래서 아이의 부모가 궁금해졌다. 아직은 어린아이지만 그래도 사회에선 약자고 생활에선 부모의 영향과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부모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골목길이기에 이곳에 부모처럼 보이는 부모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아이의 시선을 본 뒤 나는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하나 같이 다른 색이지만 비슷하게 생기고 같은 구획의 주차장이 딸린 빌라들만 보였다. 앞에는 주황색 벽돌. 옆에는 사방팔방이 콘크리트. 왼쪽 방향에는 구워낸 기와 같아 보이지만 실제 기와가 아닌 플라스틱 기와로 된 낡은 저층 주택. 오른쪽 방향으로는 지하철역으로 갈 수 있는 능선 같은 고도의 오르막 아스팔트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구조와 건물들 그리고 동네의 전경까지 둘러보고 파악하고도 처음 보는 낯선 남자아이는 여전히 나의 오른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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