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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있다.
밥을 몇 수저 들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꼭 중요한 말을 해야 할 때나 나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는 말을 할 때에는 익어가는 밥솥처럼 뜸을 들였다. 물론 아버지의 입에서 김새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침묵이 기다리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뭔데.
... 지난주 병원에 다녀왔다. 가슴 쪽에 이상한 느낌이 있어서 말이야. 아프진 않았거든. 그런데 정말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각이 있었어. 지금도 물론 있고. 그리고 국가건강검진을 해야 할 때도 다가와서 한번 검사 차 갔었어.
근데.
근데 문진 하는 의사가 내가 그런 증상이 있다고 하니까.
가슴에 느끼는 거?
그래. 있다고 하니까 청진도 해보고 등도 두드려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가슴 쪽 CT도 정밀하게 찍어보자는 거야.
응.
그래서 CT를 찍었고 어제 결과가 나왔어. 근데 폐암이래.
폐암? 아빠 담배도 안태우잖아.
그러게.
아버지는 마지막 말을 하곤 잠시 수저를 쳐다보았다. 아마 수저 속의 자신을 본 것일 터. 수저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다. 일흔이 넘은 나이이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록 강건했던 그의 신체엔 위협이랄 만한 것이 없었다. 쉰쯤 충수가 터져 복강을 모두 씻어내는 개복수술 외엔 특별한 병치레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진단된 암이라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예리하고 날카로운 바늘과도 같은 것이 곳곳을 찌르는 것 같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초기인 것 같다는 의사의 추측성 말에도 말이다. 상징적이라는 것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곤 그 중심부에 꽂아버리는 깃발처럼 암이라는 것이 아버지를 이루는 근간에 깃발을 박아버렸다. 수저에 비친 모습을 내가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옆에서 보는, 이제는 노인에 가까운 나이가 된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입 꼬리, 눈가의 주름, 많이 빠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 아래의 빛나는 두피, 큰 눈, 큰 코, 그럼에도 강건해 보이는 턱. 그러나 그는 이제 환자가 되어버렸다. 암이라는 것이 이제는 치료가능 영역의 진단이라 해도 아버지 나이대의, 그러니까 내 나이 기준 나보다 더 어른들에게 암, 불치란 가면을 쉽게 벗길 수 없다. 암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 주는 상징성이 더 강력한 것이다. 생각이 쌓이고 관념이 되어 신념과 무의식까지 기억이 뿌리내린다면 그것을 그 아무도 제거할 수 없다. 그런 존재가 어른,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암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엄마는 한 수저도 밥을 뜨지 않았다. 그녀가 전기밥솥에서 흰 밥보다도 새하얀 주걱으로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담은 고봉밥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어딘가 불살라지고 찢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연약하고 유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르게 정말 약한 사람이다. 우리는 주방 식탁에 모두 앉아있지만 한 명은 자신이 비치는 은빛 쇠 수저를 보고 있었고 한 명은 먼 허공을 바라보았으며 또 한 명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삶은 정말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이곳에 내가 앉아있지만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꼈다. 아버지의 표정 속에서 어머니의 눈빛 속에서 나의 마음속에서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해준 밥을 먹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위로를 건넬 수도 어머니에게 밥이 맛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약한 내가 더욱더 약하게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지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나는 나의 아버지라는 존재를 넘어선 저 인간, 내가 알고 있는 일흔의 강건한 어른이자 노인의 초입에 있는 암환자의 인생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그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것을 언제나 훈장이자 인생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여겼다. 그리고 두 아들은 자신의 앞가림정도는 충분히 하고 살고 있으며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적당히 생겼으며 부랑자나 떠돌이가 되지 않도록 교육도 잘 한 편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니까 일흔 남자인 암환자로서 남은 인생이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남은 인생보다 살아온 인생을 더 추억하고 더 간직하고 더 자랑스럽게 살아갈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판정받은 암이라는 것에도 조금은 불투명함을 느꼈다. 의사의 전문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냥 암이라는 것이 그에게 정말 강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불투명한 암. 오랜만에 마주 앉은 세 가족은 적막의 커튼 속에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엄마의 밥은 따듯하고 좋았다. 아버지도 오랜 시간 공들여 수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한 뒤 관찰을 끝마쳤는지 밥을 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도 자신이 차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적막 그리고 삶.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적막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본가에서 꽤나 게슴츠레했던 식사와 대화를 마치곤 다시 집으로 향했다. 입추가 지나서 그런지 해가 저물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가을의 가벼운 서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입추의 밤이라 아직은 여름의 날씨를 느낄 수 있지만 어쩐지 상황적으로는 나의 삶은 입추와 같다고 느꼈다. 바람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가늠했다. 아직은 여름이라고 알려주는 매미들의 울림과 흔들리는 나무들의 잎사귀가 사부작 비벼대며 나는 소리의 조화는 아름다웠다. 여름과 가을.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상쾌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나의 곁을 떠났다. 이유는 아직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만나는 경우의 수는 없었다. 떠났다.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순간부터 이유를 찾을 이유가 없어졌음이 더 짙어졌다. 해가 지고 어둠이 빛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더욱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의 상황을 비관했다. 그 모습이 나를 더 비관적으로 만들었다. 친밀하지 않은 부자관계지만, 혈육으로 이어진 부모라는 존재는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지금까지 길러준 존재들이다.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닌 혈육이라는 깊숙하고 더 깊은 곳에 묶여 있는 관계. 그런 존재의 미래 속 부재를 생각하니 어쩐지 더 가을바람은 몸속 깊이 파고드는 듯했다. 손가락을 쫙 펼치고 마음껏 바람이 나를 통과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무기력했다. 무기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지금 이 순간도 한걸음 걸으면 바로 과거가 된다. 불행들은 항상 떼처럼 몰려온다. 철새들이 겨울에 들어서 다 같이 떼로 대륙 간 이동하는 거처럼 불행 역시 떼처럼 순응해야 하는지 반항해야 하는지 거역해야 하는지 무관해야 하는지 혼란함으로 가득했다. 단순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집으로 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다행인 것은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집에 가면 시원한 맥주를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렇다. 집에 가면 된다. 집에만 가면 된다는 것을 머릿속에 주입한 후 알 수 없는 평안감에 휩싸였다. 한강을 따라 걸었다. 걷다 보면 강서구가 나올 것이기에 한강을 따라 걷기로 했다. 날씨가 풀렸다는 것을 사람들은 느꼈고 선조가 만들어 놓은 절기도 알았고 온갖 미디어에서 모든 알린 이유에선지 한강둔치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한강을 따라 각자 다른 목적지를 한 러너들 그 옆을 바람의 속도처럼 날쌔게 달려갔다. 그리고 힘차게 달리는 바이커들. 이제 막 사랑을 알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연인들. 그리고 지금이 지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나 외에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 같았다. 그럼에도 다양한 삶의 형태를 잠시나마 들여다볼 수 있어 그마저도 나에겐 위로가 되었다. 그곳엔 과거의 행복, 미래의 행복, 현재의 행복이 모두 공존하고 있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은 어디에 있나 궁금해졌다.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녀를 만난 것도 행복해서 만났던 것 이라기보다는 나와 비슷한 모습을 엿보았기에 그리고 왠지 모를 연민감이 생겼기에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그녀를 동정했기에 같이 공존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마음들의 존재를 안 순간, 나는 굉장히 아프다고 느꼈다. 그녀를 잃었기에 아린 것이 아니라 내게는 그런 마음만 있는 것에 대한인지는 선고와도 같았다. 아버지가 폐암진단 선고를 받았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행복이란 무엇인지 이제는 잘 알지 못하겠다. 이전에 내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던 시절이 있었을까. 있었겠지. 세상을 알아가고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했던 시절엔 분명 나는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겠지. 그러나 그 잔존감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고이 모셔놓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마음 앞에 나의 정신 앞에 나타나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나를 모르겠다. 이것이 꿈인지 진실인지 현생인지 거짓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래서 끊임없이 걸었다. 다행히도 한강은 끊임없이 길이 있었다. 서울에 한강이 있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포용하고 위로해 줄 수 있다고 느꼈다. 서울의 중심을 끼고도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고리와도 같겠구나 싶었다. 순환하는 물들이 돌고 돌아 또 한강으로 바다로 나갈 것이고 바다의 물은 증발할 것이고 증발된 물은 이곳저곳 내리고 마르고 떠돌다 다시 한강에 모이는 날도 있겠지. 삶은 어쩌면 머무르는 곳에 계속해서 머무는 것일지도 혹은 운동성이 존재함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일지도 삶은 그런 것일지도 정말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까지 끝끝내 걸었다. 한결같은 한강을 따라 걸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