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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 Oct 20. 2024

고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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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아오고 있는 분들. 여기저기서 유입되었다고 한다. 동네 중심에 있는 정자 휴게소에 가면 이따금씩 과거 얘기를 해주시곤 해서 익히 알고 있다. 함흥, 부산, 인천, 괴산, 함평. 등등. 그렇게 이곳은 새로운 군집소가 되었다. 누구는 전쟁에 의해 누구는 재해로 인해 누구는 자의로 인해 형성된 마을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타 새로 생긴 신도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생명들이 모여 만들었던 곳이지만 생명력의 힘은 이미 이곳을 떠났다. 꺼져가기를 기다리는 불꽃과도 같았다. 심지는 타고 타고 또 타서 검은색 그을음이 뭉쳐진 심지였다. 나무들도 그런 분위기를 공유하는 것인지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기보다는 서로의 영역을 지키듯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무들은 잎사귀마저 메말라있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놀이터보다는 경로당 기원 백반집이 주를 이룬다. 털보에 가게 옆에 있는 미장원은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카락 정리해 주었을 터. 처음에 개업할 때는 미장원이었겠지만 지금 지나치다 보는 광경으론 사랑방에 가까운 존재로 보인다. 하루는 할머니들이 머리에 온통 무언가를 치렁치렁 매달고는 밤늦게까지 모임을 하고 있는가 하면 하루는 할배들이 머리를 정리하러 줄을 서고 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고 머리가 반듯하게 정리된 할배들은 조금 더 걸어가면 있는 슈퍼마켙에서 막걸리를 자시곤 했다. 그 맞은편 세탁소에 걸린 –코ㅁ퓨타세탁- 단어는 나에게도 생소할 만큼 오래된 단어임과 동시에 그곳 역시 이 지역의 원주민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런 동네엔 역시나 아이가 없다. 어린아이라는 것은 멸종에 가깝다. 그래도 마을의 크기는 작지 않은데 내가 아는 아이는 단 두 명이니 말이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의 힘은 확실히 보이지도 들리지도 경험하기에도 역부족이다. 어디를 돌아봐도 희끗한 머리색이 보이거나 삶을 오래 살아 새로운 것이 새로울 것도 없는 경험을 해온 사람들만 있었다. 육이오 남북전쟁은 기본이며 팔일오 광복을 경험한 세대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기억마저 안고 살아가는 분도 왕왕 계셨다. 그래서 기묘했다. 나의 옆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있는 이 작은 생명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어린 생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곳에서의 삶을 개월 넘어하다 보니 아이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웠다. 나는 아직 이곳의 원주민인 어르신들의 무던함을 따라갈 만큼 많은 경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르신들은 아마 건널목 경로당 앞에 아이가 있었다 해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아직은 직장으로 출근을 재빨리 하지 않아도 크게 늦지 않을 시간대다. 대략 십분 남짓 시간이 있다. 그 정도면 버스도 지하철도 한번 정도는 더 미룰 수 있는 시간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십 분이라는 시계적 관념이 아닌 공간의 관념. 십 분이 공간의 개념이 되면 그 존재는 무에 가깝다. 시간이 버려져도 시간이 흘러가도 시간이 삭제돼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행동과 모습과 분위기를 느껴보았다. 처음에는 다섯 살 정도로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네 살 정도로 보인다. 근거는 다섯 살이라기엔 조금 작고 네 살이라기엔 조금 크다. 아이를 키워본 적은 없고 사촌가족들 주변에도 이만큼의 나이대를 가진 아이는 없지만 성년이 되는 시기동안 나도 본 것이 있기에 경험적인 측면에선 그렇다는 것이다. 옷은 생각보다 말끔하다. 흰색 나일론 아노락반팔 티셔츠와 카키색 카고 반바지. 누가보아도 성인인 누군가가 챙겨주어 입혀준 세팅이었다. 이런 옷의 구성을 스스로 만들어 입을 수도 없을뿐더러 작은 디테일을 신경 써줄 수 있는 것은 부모 말고는 없을 것이다. 가령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라면 절대 나일론이라는 소재를 입지도 못할뿐더러 주머니가 많이 달린 바지를 입는 것은 더더욱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가 이 고장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인물이 아닌 외딴곳에서, 이 마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유입된 생명체라고 여겼다. 이렇게 판단하는데 까지는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 아직 구분 오십 초가 남았다. - 그리고 아이의 손과 발이 깨끗하다. 신발은 많이 신어 주름이 보이지만 관리가 잘 된 스니커즈였고 그 역시 부모의 손길이 일정 수준 닿아 말끔하게 유지시켜 주는 느낌이 풍겼다. 머리스타일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더벅머리같이 보이지만 머리 결과 다른 결 사이의 일정한 간격이며 위아래의 기장차이이며 머리카락이 마무리되는 구레나룻과 뒷목엔 잔털이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최근에 미용실을 들른 것이나 혹은 부모가 바버샵을 하는 것이라 상상하게 만들 만큼 훌륭한 솜씨였다. 아이는 분명하게 외딴곳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의도되었고 좋은 손길이 닿은 모습이었다. 버려질 모습은 아니었고 내가 걱정할만한 일이 그리고 경찰과 대면해야 할 일이 필요치 않음을 의미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시간의 공간이 대략 구분정도 남은 사이에 그 공백을 내가 아닌 다른 일로 채울 만큼 대인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았을뿐더러 아이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아이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무엇을 응시하는 것인지도 정확치 않았다. 바닥을 보다가 불현듯 맞은편의 창문과 벽돌의 개수를 확인하는 듯했고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 뒤 잠잠코 있었다. 말을 걸어볼까 생각하다가도 나의 삶의 굴레 중 중요한 부분인 출근을 미룰 수 없었다. 삶의 일정한 패턴은 나에게 중요했고 그것 없이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데에 약 오 분정도 사용한 터라 이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지하철을 타러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 생각대로 나의 몸을 이끌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어지며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아이가 신경 쓰였다. 그러지 말아야 된다,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소돔과 고모라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끓어오르는 본능적 관능적 감각을 억누르고 또 억누르다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아이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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