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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벗어났다. 잠에서 깬 것이 아니라 잠에서 달아났다. 악몽을 꾼 것은 아닌데 잠에서 깨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직감적이나 사회화를 거치며 직감이 낡은 청동검처럼 무뎌지는 것이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청동검도 청동기시대에선 위대하고 예리한 무기였을텐데 말이다. 사족보행을 하며 야생에서 직감을 통해 살아가는 동물들처럼 사실 인간, 사람도 똑같은 직감적 동물이다. 정확히 존재여부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직감적으로 무엇을 인지한 것이다. 그런 직감은 잠을 자면서도 활발하다. 잠을 자고 있어도 직감은 꺼지지 않는다. 잠에 든 것처럼 보여도 뇌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뇌 과학의 권위자는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과학적으로 직감이라는 것은 아직 정확하게 연구되지도 파악되지도 않지만 나는 확실히 안다. 직감은 파악되어지지 않은 어떠한 이상점이자 발현점이라는 것을 강하게 믿고 있다.
시계를 보니 시계마저 어두컴컴한 3시. 새벽 3시겠지 하고 시계에서 눈을 거두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직감이 말했다. 무엇인가가 변화되었다. 직감이 말했다. 이른 새벽 깊은 새벽에 깨어난 이유는 직감이 무엇인가 변화했음을 알려주었다. 찬찬히 어두운 방을 둘러보았다. 방안의 구조는 변화해 보이지 않았다. 옷걸이도 그대로 있다. 자기 전에 피운 담배도 재떨이에 꽁초로 구겨져 있었다. 마포 빈티지샵에서 값싸게 구매한 전등도 낡아 온 모습 그대로. 방문 틈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부엌 위 컵들도 그 모습 그대로의 것들이었다. 한숨 안에 볼 수 있는 시야에선 변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직감은 말하고 있다. 변했다고. 불안해졌다. 불안감에 더듬더듬 그녀가 있을 자리를 두 손으로 찾아 헤맸다. 그런데 없었다. 그녀가 있을 자리에. 그녀가 있던 자리에. 그녀라는 흔적도 없이. 밤새 누워있었다면 이부자리 사이로 온기가 남아있을 텐데 그마저 없이 냉기만 존재했다. 직감은 말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이라고. 직감은 부존재를 알린 것이다.
이상했다. 분명 밤 10시에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잔 그대로 부엌식탁 위 놓여있다. 컵에 남은 맥주거품 자욱마저 흰색 테두리를 희미하게 남긴 채 실존했던 일임을 알려주었다. 거품은 말라비틀어져 흰색 재처럼 잔 안쪽으로 희끗희끗 남아있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기억 속의 그녀 흔적을 좇아 보았다. 침대를 벗어났다. 내가 누워있던 자리는 나의 모습대로 매트리스 커버에 내 몸 크기와 비슷한 형태가 있었다. 조금 구부정하게 잔 흔적이 잠시 동안 내가 맞겠지 라는 생각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누웠던, 그녀가 누워있던, 그녀가 누었었던, 그녀가 누워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자리엔 그런 자욱이 없었다. 가지런히 놓인 베개, 팽팽한 매트리스커버, 재떨이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해 보니 그녀가 태우던 카멜블루 꽁초도 없었다. 나만이 피우던 카멜레드 꽁초만 있었을 뿐. 그녀는 흔적까지 거두고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항상 작은 리버시블 검정 나일론 백만 들고 다녔다. 그 가방은 항상 우리 집에 있는 낡은 소파 뒤에 보관했었다. 가방 역시 사라졌다. 마치 지나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버린 채 무엇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날벌레 무리처럼. 지나가서 아무 존재도 아니게 되어버린. 나에게 그녀가 중요한 존재였는지 나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잘 알 수 없었다. 분명 오랜 시간을 나의 집 그리고 그녀 집에서 같이 공존하며 시간을 공유한 것은 맞지만 그녀가 나에게 중요한 인물인가에 대한 대답은 나 스스로도 정확하게 할 수 없었다. 이상했다. 우리는 분명 같이 일어나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이 양치를 하고 같이 옷을 입고 같이 신발을 신고 서로의 집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했고 다시 밥을 먹고 같이 담배를 태우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던 사이였다. 이렇게 무無의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이 이상했다. 실존했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의 집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존재라면 그것이 환각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 나는 그녀의 집이라는 나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이동을 했다. 그래서 더 막막했고 막연했다. 머리가 아파오고 어지러움을 느껴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소파에 누워 산세비에리아화분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 얇아 보였다. 화분에 물을 주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다. 그녀가 우리 집에 왕래를 시작한 후로 화분에 신경을 쓸 시간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산세비에리아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면 현실이 맞을 테다. 두통과 현기증을 이겨내고 겨우 몸을 소파 끝을 잡으며 일어났다.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 일어났다. 화분 옆에 있는 아이보리색 철제 조리개를 들고 싱크대로 가 물을 담았다. 그리곤 산세비에리아가 담긴 화분에 물을 천천히 그리고 정성스레 주었다. 그녀가 사라지니 오히려 삶의 일정 부분에 내가 닿아야 할 부분들이 닿음을 받지 못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더 산세비에리아가 담긴 화분을 들여다보며 물은 얼마나 잘 내려가는지 얼마나 흙에 물이 마른 것인지 소리를 들어보고 눈으로 느껴보았다. 화분에 물을 줄 때에 화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분의 물이 물을 먹는 머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평소의 물소리와는 전혀 다른 음을 들려준다. 의성어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물의 소리가 존재한다.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아니라 빨아들여지는 소리. 흙 속으로 물이 저장되는 소리. 흙이 물을 마시는 소리다. 그렇게 아끼는 산세비에리아의 잎을 매만지며 그녀가 사라진 것에 조금은 관심을 더 놓을 수 있었고 집안 곳곳에 두어야 할 관심들을 둘 수 있었다. 이참에 청소와 온갖 정리를 하자 싶어 담뱃재가 새끼손톱정도 쌓인 창틀을 말끔히 닦아냈다. 그리고 소파 옆에 작은 탁상 위 놓인 재떨이도 말끔하게 세척했다. 카멜 블루와 카멜 레드 찌꺼기의 조화는 평범하면서도 아름답고도 지독했다. 담배의 잔해를 지우는 데만 하여도 족히 20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렇게 그녀가 남긴 잔해들을 차례차례 없애나 갔다. 창틀부터 시작해 소파 그리고 매트리스 그리고 욕실까지. 생각보다 깊게 뿌리내린 그녀 흔적들은 시간이 앞으로 흘러 나아가야 그 모습의 힘이 약해져 그제야 제대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청소와 정리에 힘을 들이고 정성을 들였음에도 없어지지 않는 향이 존재했다. 그러기에 그녀의 흔적, 많고도 빼곡한 것들이 절대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는 떠난 이에 대한 농밀한 슬픔이나 그녀가 나의 옆에 있어야만 하는 정확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이쯤이면 되었다 싶을 만큼 정리를 하고 나니 시계는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물건들과 흔적들을 정리한 것이지만 나의 내면적인 정리도 같이 진행하고 있었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을 때 가슴에 돌을 올려놓은 듯 묵직하고 쓰리듯 아린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끝없이 흔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해치다 보면 그 흔적의 깊숙한 곳에 닿을 수 있을까 하고. 그러나, 그리고, 역시나, 확실히 그녀, 내 곁에서 사라진 것이 맞았다. 하루를 이루는 전체가 지나서야 그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창가에 산세비에리아 화분을 비롯, 집안을 구성하는 물건들의 그림자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시간부터 밤이 되어 그림자가 사라지기까지 진행되던 정리는 우리의 같이 있던 시간과 공간을 기념했던 것이다. 그녀를 찾아야 할까. 그녀가 떠난 이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니 알 수 있는 하나는 있었다. 없어졌다는 것.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이유를 찾아야 할 명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 몸을 툭 소파에 던졌다. 그녀와 우리를 형성한 다음의 순간부터는 침대에 몸을 뉘였었지만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소파로 돌아왔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소파에 누운 채 잠을 청했다.
역시나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습관은 육체와 정신을 비롯 의식과 무의식까지 뿌리가 깊숙이 내려앉는 것이다. 시간은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시간은 거스를 수도 없는 것이고 시간은 그저 순응의 방식으로만 대화를 청하고 허락한다. 그녀가 옆에 있었을 때 나는 쉽게도 잠에 빠져 들었다. 그녀와 다툼이 있어도 잠만큼은 쉽게 여겼다. 이대로 누워있으며 상처를 느끼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날은 굉장히 습했다. 여름밤의 날씨마저 꽉 막힌 나의 상황을 대변하듯 투영하듯 거울을 보듯 또렷이 나를 비추었다. 달빛아래 나만 존재한다. 그래도 달리는 것 외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언제나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생각에 사로 잡혀있지 말라고. 생각은 몸의 행동력을 죽이는 것이라고. 지금 나는 생각에 잠식당하고 있는 상태이다. 아니 잠식당해 행동적 죽음에 달하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겁고 송장 같은 다리를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다. 한발 한발 리듬감을 느끼다 보면 다시 생명의 굴레로 나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리라. 지금의 상황에서 다행이라 볼 수 있는 점은 평소에도 십 킬로미터를 뛰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다 보면 생각들이 사라지고 그저 스쳐가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그마저도 쉽사리 되지 않는다. 달리는 동안엔 하늘을 종종 본다. 오늘 하늘은 정말 맑다. 하천가를 달리며 별을 보는 일은 정말로 손에 꼽는데 오늘은 왕왕 별의 빛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옆을 스쳐가는 밤 산책객들. 산책하는 사람들은 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곤 한다. 달리는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인지 본인도 달리고 싶은데 그만큼의 용기가 없는 것인지 뚫어져라 얼굴을 쳐다본다. 다리의 무게감에 조금씩 생명력이 돌면서 가벼워짐을 무의식적으로 느낀다. 그러면서 달리는 속도는 조금씩 빨라진다. 앞서 달리고 있던 여성이 보인다. 그녀의 몸 라인에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달리기를 꾸준히 한 것인지 그녀의 몸은 단단하니 내면의 인내력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속도도 꽤나 준수하다. 그렇지만 그녀에게서 자연스럽게 눈을 뗀다. 그러곤 조금 더 속도를 올려 그녀를 지나친다. 이후엔 그녀가 어떤 모습을 띄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천에 유유히 헤엄치는 오리 일가족이 보였다. 모두들 오리 일가족 곁에서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부모로 보이는 성년 오리 한 쌍 그리고 다섯 마리의 작은 아기오리들. 그 모습은 까마득히 해가 기울어진 밤에도 아름답다. 그 모습을 산책객들은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삼삼오오 핸드폰을 들어 각자의 위치에서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찰나의 아름다움 또한 스쳐 지나간다. 반환점을 돌고 비슷한 것들을 다시 본다. 마주쳐 가는 여성 러너를 보았고 오리를 구경하는 산책객들 변화한 맑은 하늘의 별빛 그리고 달빛에 비치는 강물의 흐름 속 윤슬까지. 달리는 동안엔 세상 속에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세상에 내가 살고 있고 나는 죽음에 가깝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달리는 것을 나는 멈출 수가 없다. 십 킬로미터를 한 시간에 걸쳐 뛰어낸 뒤 시원한 물로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냈다. 생각과 땀과 하루와 피로를. 오늘을 구성했던 하루는 너무나도 고되었지만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난다. 냉장고에서 남은 칼스버그 맥주와 유리잔을 들고 소파 위로 풀썩 앉았다. 십 킬로미터를 달려서 그런지 다리에는 달리기 전 무게감보다는 가볍지 만 또 다른 무게감이 부여됐다. 분명 무겁지만 기분 좋은 그리고 힘이 없지만 힘을 털어낸 무게감. 맥주 한잔을 유리잔에 두세 번에 걸쳐 따라내어 마시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몸과 정신 모두 지쳐있다. 나른하니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느낀 순간 정박하기 위해 쏟아지는 닻 같은 무거운 잠에 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