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인 내 동생
"제발 그만 좀 해!!!!!!"
길바닥에 주저앉아 말썽꾸러기인 동생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친구들이 지나가며 저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쌓아왔던 답답함이 한순간에 터져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책임감이 저와 동생을 키우는 것이었다면, 저의 책임감은 동생을 잘 보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 동생을 돌본 것은 순전히 동생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동생은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이 꽤나 늦은 나이까지 말을 잘 못하는 것을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이는 곧 절망감으로 바뀌었습니다. 동생에게 의사소통 능력이 지연된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철없는 마음에 동생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싶은 마음도 약간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같은 학교의 특수학급에 다녔기 때문에 함께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힘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동생과 함께 학교에 다니면서 은근하게 동생의 장애를 흉내 내며 놀리는 같은 반 애들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동생과 같이 다니며 버스에 타도 매번 소리를 지르는 동생을 말리느라, 이곳저곳 때리며 흥분하는 동생을 붙잡느라 눈치가 보인 적도 많았습니다. 마냥 애기 같았던 동생도 하루가 다르게 커 갔고 힘도 세졌습니다.
'나도 앤 데 왜 동생까지 씻기고 화장실까지 매번 따라가야 하나' 하는 불만도 있었지만 아버지 혼자서만 동생을 케어하는 것은 역부족이었습니다.
보통 남매 사이라고 하면 티격태격도 많이 하면서 컸을 텐데. 나아지지 않는 동생을 보며 현실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원망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것도 내 운명이겠거니, 하고요.
매번 동생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처음에는 까칠하다가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는데 지금도 동생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몸이 배어있는 기억들 중 하나입니다.
매번 잠이 들 때 제 팔을 잡아끄는 동생의 모습, 세상 누구보다 컵라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 건축물 그림을 그릴 때 열중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했던 날도 많았습니다.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이 시설에 잠깐 지낼 예정이라고 해서 동생을 보러 가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도 가끔 시간을 내어 동생 시설에 가면 동생은 친누나인 줄도 모르고 어디선가 예쁜(?) 누나가 와서 마냥 좋은 듯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동생을 자주 보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니 동생이 시설의 보호 속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에는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동생 덕입니다. 나아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도, 그것을 수용하는 방법도 조금은 배웠습니다.
동생을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저의 눈물버튼입니다. 그 눈물엔 안쓰러움, 분노, 미안함도 함께 담겨있습니다.
동생과 함께 지내며 돌본 시간들, 그리고 동생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이후의 삶에서 무언가를 돌본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저와 동생을 두고 떠났듯이, 제가 동생을 두고 혼자 집을 나온 것은 평생의 미안함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선택할 수 있다고 해도 집을 나온 것은 제게 최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