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2편
“아임 해빙 마이 피어리어드!”
‘어? 설마!‘
초경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출국하기 전에 아버지가 혹시 모르니 종이에 적어두라고 했었는데, 당혹스러운 순간에 종이가 있어 참 다행이었습니다.
홈스테이 맘에게 얘기하자 축하파티도 해주시고, 생리대를 돌돌 말아서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셨습니다.
처음엔 친구들한테 말 거는 것도 엄청 떨렸었는데, 두 달간의 캐나다 학교생활을 즐겁게 마치고 '나중에 크면 언젠가 해외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더 이상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셨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던 그 날처럼 말입니다.
더 이상 살던 아파트에서 지낼 수가 없어 어느 가난한 집과 마찬가지로 이사를 참 많이 다녔습니다. 씻을 곳이 없는 사무실, 화장실이 없는 창고에서 집처럼 지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곱등이 같은 벌레도 많고 항상 집에 모기향이 피워져 있는 탓에 학교에서
'비듬이 있다' ,
'냄새가 나는 것 같다' ,
'너 담배 피우냐' 하는 말을 들었을 땐 속이 좀 상했습니다. 가난과 냄새, 그리고 벌레가 한 세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좋은 친구들도 참 많았어서 집안 형편이 좀 어렵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무시를 당하진 않았고,
학교에서 우유를 지원받아 낑낑거리고 들고 갈 때면 동생들이 장난스럽게 ‘할머니 제가 들어드릴게요’ 하며 함께 우유를 들어주기도 했었습니다.
심지어는 집에서 자주 보던 곱등이 관찰보고서를 제출해 칭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시절엔 노래 부르는 것에 심취해 청소년 가요제에 나가 대상을 타기도 하고,
미국 단기 연수에 선발되는 등 제법 성실한 학교생활을 보냈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이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장학금도 종종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밀린 외상을 갚는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빈도도
저를 향한 기대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아픈 동생과는 비교되는 저였기에 더 기대가 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완벽에 가까운 저를 강요하는 아버지의 요구는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해 혹시나 집에 가서 맞을까 봐 놀이터를 서성거리다 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는 신발장에서 자라며 저를 밀쳤습니다.
그러면서 집 안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다 집어던졌습니다. 그래서 항상 집어던지는 것이 일상인 아버지와 지내며, 눈에 집히는 물건이 없도록 집안을 깨끗하게 정돈하는 것이 몸에 배었습니다.
“엄마도 없이 아빠가 혼자 이렇게 아이 둘을 키우시고, 참 대단하세요.”
남들에게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임에도 장애가 있는 아들과 딸아이를 키우는 세상 누구보다 자상하고 희생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어린 저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지만 저와 동생을 먹여 살린 것은 '아버지의 책임감'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육아는 처음인데, 기초수급자 지원을 받으며 두 아이를 키우고 한 아이는 장애까지 있으니 삶의 무게를 견디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집 밖을 나와 버스만 타면 동생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에 언짢은 표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돌이킬 수 없는 동생의 아픔을 원망하면서,
늘어만 가는 빚을 보면서,
장사를 접는 정육점에서 받아온 값싼 고기를 한 달이 넘도록 구워 먹으면서,
전기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촛불을 켜고 하루를 지내면서,
아무리 잡아도 끝이 없는 벌레들을 쫓아내려 피운 모기향에 찌들어버린 옷들을 주워 입으면서,
돈을 빌리느라 굽실거리는 것이 일상이 된 본인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회복될 가망이 없는 가난에 지쳐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폭력을 옹호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가난한 가정에서 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분노, 안쓰러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함께 뒤엉키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버린 아버지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1학년 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제가 가출을 결심하고 자립을 시작하게 된 것은 정말 하루아침의 일,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