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1편
"엄마가 없으니 니가 엄마 역할을 해야 해. 안 그러면 나 뛰어내린다?"
저는 지방의 한 병원에서 1남 1녀 중 첫째,
약 2.7kg의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진부한 자기소개서의 시작 같기도 하지만 조금 더 이어가 보자면
낮엔 누구보다 헌신적이지만
밤엔 술에 쩌든 아버지,
귀엽지만 보면 볼수록 안쓰러운 동생,
은퇴 후 게이트볼을 종종 치러 나가시던 할아버지,
못하는 요리가 없으셨던 할머니와 한 집에 살았습니다.
아주 어릴 땐 아버지, 동생과 어딘가 불이 잘 들지 않는 집에서 지내면서 쥐가 나오면 열심히 꼬리를 잡고 흔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 6살이 될 무렵,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던 아파트에 들어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은행을 종종 간식으로 구워주셨습니다. 못하는 요리가 없으셔서 집에서는 전기장판이 주로 메주를 숙성시키는 용도로 쓰이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계시다 은퇴 후 게이트볼을 종종 치시며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한테 듣기로는 떡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선생님이었다고 했습니다.
집에는 항상 기초수급자 가정에게 지급되는 함바그, 미트볼 등이 쌓여있었습니다. 집 안에는 바퀴벌레가 너무 많아 나중에는 맨손으로도 슥슥 잡아내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어렸을 때는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여마셨는데, 입안에 쎄한 느낌이 들어 뱉어보면 종종 바퀴벌레 한 마리가 인사하곤 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가장 무서워하면서 동시에 가장 의지했던 아버지는 술을 달고 사셨습니다. 어린 제 눈에도 고단한 일상을 술에 의지하며 버티는 듯 보였습니다. 술을 마시면 완전히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항상 심심하셨는지 제게 끊임없이 말을 거셨습니다. 때로는 제게 술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술은 내키지 않아 종종 옆에서 돼지껍데기만 주워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집을 나가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폭력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저, 심지어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손찌검을 하곤 했습니다. ‘엄마가 없으니 니가 엄마 역할을 하라’며 협박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어수선한 집구석과는 다르게 초등학교 시절, 저는 제법 똘똘한 학생이었습니다. 전교회장에 나가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건 열심히 하는 아이에게 주는 선생님의 살가운 관심 때문에? 혹은 적어도 공부하는 아이를 무시하지는 않는 학급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오면 할아버지께서 5,000원씩 용돈을 주시곤 했습니다. 오랜만에 생활기록부를 열어 확인해 보니 초등학교 시절 83개의 상장을 받았습니다. 평생 받을 상을 이때 다 받은 것 같습니다. 5,000원 * 83개 = 415,000원이니 초등학생으로서는 꽤 쏠쏠한 재테크였던 셈입니다.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 학원에 잠깐 다녔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것보단 노래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저였지만 피아노 학원 원장님께서 옷도 많이 주시고 워낙 잘 챙겨주셨습니다. ‘피아노 선생님이 엄마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학원에서 강사로 일할 때,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가족과 놀러 간다며 자랑하는 아이들을 보면 흐뭇하기도 하고 아주 약간은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 동생과 어딘가 멀리 여행을 간 적은 없지만 미술대회에 나가거나 벚꽃 축제 등에 함께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처음으로 해외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 캐나다 단기어학연수 프로그램을 통해서였습니다. 전북도청에서 학생들을 선발하여 함께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로 향했습니다. 초등학교에 가서 입학수속을 마쳤는데 큰 강당에 모여 학생들이
“What is Responsibility?”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야 대체, 알아듣지를 못하겠네.'
저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잠이 끝도 없이 쏟아졌습니다. 홈스테이로 돌아와서도 비몽사몽 한 정신에 잠을 청했는데, 잠에서 깨어나보니 이불에 피가 흥건했습니다.
‘어?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