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글쓴이 주: 죽기 살기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먹고살기 힘든 5, 60대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던지는 삶과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입니다. 쌀장사로 20년을 살아온 제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풀어보고 있습니다.
너무 큰소리치면 안 되는 때가 있다. 겸손은 참 어렵다.
장사가 잘 되면 잘 될수록 ‘내가 장사를 하고 있기는 해도 계산적이고 영악한 너희들과는 달라.’하는 조금은 건방진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느 날 거래처 사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 하 사장, 며칠 전에 들어온 쌀에 곰팡이가 슬어 있어.
나는 속으로 발끈했다. 그럴 리가.
- 우리 집에 들어오는 쌀은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산지 미곡처리장에서 바로 들어오는데? 금방금방 팔려나가서 곰팡이 슬 새도 없는데? ‘이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평소 조금 까탈스러워 보이는 이 사장님이 또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식당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바가지로 퍼낸다. 이때 젖은 바가지로 쌀을 퍼내게 되면 바가지 표면에 있던 물방울이 포대 안으로 떨어져서 쌀이 물에 젖어 쌀이 상하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었다. 또 플라스틱 함지에 쌀을 부어놓고 쌀통 대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너무 알뜰하게 사용한 나머지 플라스틱 쌀통 밑창이 닳아 헤져서 물이 스민 경우가 있다. 얼핏 보면 멀쩡하게 보여서 얼른 알아보기 어렵다.
내가 얼마나 철저한 장사꾼인데 곰팡이 슨 쌀을 내보내겠는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 지들이 잘못해놓고 나를 탓하다니. 나를 뭐로 보고! 같이 장사하는 사람끼리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몹시 불쾌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식당으로 달려가서 쌀포대를 살폈다.
쌀 아래 부분 실밥 부분을 경계로 포대 안쪽에 곰팡이가 붙어있었다. 즉시 식당 바닥에 물이 흘러서 쌀포대가 젖어 곰팡이가 생긴 것이라고 판단했다. 식당에서 포대 관리를 잘못해서 물이 튄 것이라고 항변했다. 내가 하도 강하게 항변하니 식당 사장님도 그런가 하고 내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며칠 뒤 다른 거래처에서도 똑같은 문제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쌀포대 한쪽 면 전체가 상해있었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앗! 나중에 알고 보니 잘못은 우리 쪽에 있었다.
쌀은 미곡처리장에서 바로 전날 도정해서 바로 트럭에 싣는다. 트럭 업자의 일정에 따라 다음날 새벽에 부산으로 출발한다. 오후 늦게 도정작업을 마치고 출발하기 전까지 얇은 천막이 덮인 채 트럭에 실려 있었다. 노상에서 밤을 새운 트럭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쌀을 막 도정하고 나면 제법 뜨끈할 정도로 열이 난다. 채 식지 않은 쌀이 쌀포대에 담겨 있다 보니 새벽녘 기온차로 트럭을 덮고 있던 천막 아래쪽으로 습기가 생겨서 물방울이 맺힌 것이다. 이 물방울들이 종이로 된 쌀포대를 적신 것이다. 물에 젖은 포대 안쪽에 있던 쌀이 습기에 손상을 입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모르고 포대 겉면이 말라서 보기에만 멀쩡했던 쌀들이 팔려나갔던 것이다.
식당 사장님께 멋쩍게 사과를 드리고 굽신거려야 했다. 쌀을 몇 됫박 더 드렸다. 체면을 구긴 것이다. 윽,, 뒷 골이 아프다.
아주 억울한 경우가 있을 때도 있기는 하다. 사연은 이렇다.
아마 학교는 겨울방학이 한창이었을 거다. 아침 무렵에 배달을 갔다. 고등학생쯤 되는 여자 아이가 쌀을 받았다. 다음날 전화가 왔다. 배달 갔던 집 아주머니인데 무슨 일인지 대뜸 화부터 벌컥 내었다.
말인즉, 쌀 배달을 주문한 아주머니는 오전에 학원 가야 하는 딸에게 쌀을 받으라 해놓고 출근했다고 한다. 딸은 학원에 갈 시간인데도 엄마를 위하여 밥을 해놓고 학원에 갔다.
엄마가 저녁 늦게 퇴근했다. 그런데 전기밥솥을 열어보니 밥이 밥솥 바닥에 눌러 굳어져 떡이 져있더라는 거다. 아주머니는 쌀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화가 단단히 나서 어떻게 이런 쌀을 가져다줄 수 있느냐? 당장 쌀을 가져가고 돈을 물어달라고 노발대발했다. 상대가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내니 성질이 괄괄한 나도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 클레임이 일절 없는 쌀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어쩌랴? 할 수 없이 쌀을 가져왔다. 집에 와서 밥을 해보니 고슬고슬하니 좋기만 했다.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아내가 말했다.
- 혹시 어린 딸이 잘 몰라서 스위치만 ‘취사’로 눌러놓고 바로 학원에 가버린 것 아닐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거의 확실하다. 밥을 하고 난 직후에 밥통을 열고 밥을 위아래로 완전히 뒤집는다는 생각으로 잘 저어서 수증기를 날려 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밥알에서 나온 전분끼리 들러붙어서 밥이 밥솥 바닥에 그대로 눌어붙게 된다. 물이 끓으면서 생긴 수증기도 그대로 밥통 안에 갇히게 되니 식감도 퍼석해진다.
궁금하면 한 번 해보시라. 살림하는 주부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어린 학생이 그런 것까지 확인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학생이 기특하다. 어머니를 도와준다고 한 일일 것이니 말이다.
마침 전기밥솥이 김을 내뿜고 있다. 곧 있으면 쿠쿠 아가씨가 알려준다.
- 쿠쿠가 맛있는 밥을 완성했습니다. 밥을 잘 저어주세요.
쿠쿠 아가씨는 마음씨도 예쁠 것 같다. 친절한 쿠쿠 아가씨가 예전에도 있었더라면 내가 욕을 먹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사실 나도 생각해보니 장사하기 전에는 아내를 도와 밥을 해 준다든지 하는 일을 해 본적이 별로 없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면서 돈 벌어다 준다는 좀스런 당당함으로 살았다. 그러나 장삿길에 들면서 고생하는 아내가 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장사하면서 사람 된 셈이다.
쌀장사를 하다 보면 난처한 경우는 또 있다.
햅쌀에서 벌레가 나오는 경우이다. 각 지역별로 나오는 첫 햅쌀은 추석이 되기 전에 출하된다. 추석 차례 상에는 햇과일, 햇벼로 찧은 햅쌀이 올라가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보통 추석은 절기상 입추 언저리에 걸쳐 있어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을 때라 기온이 한여름이나 별 다를 바 없다. 더구나 추석에 맞춰서 벼를 수확하고 도정하려면 벼를 건조시킬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것이다.
이런 때 쌀벌레 작은 알이 공중에 떠다니다가 쌀포대에 내려 않거나 한느 일일 생기면 큰일이다. 정미소에서 아무리 청결을 유지한다고 해도 눈에 안 보이는 쌀벌레 알을 완벽하게 없애기는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쌀벌레는 기온이나 습도가 부화에 알맞으면 스스로 깨어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곧 고물고물 꼼지락 거리는 것들이 눈에 보인다.
손님 입장에서는 햅쌀이라고 사 왔는데 벌레가 나오면 기겁을 할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묵은쌀을 햅쌀로 속여 판 파렴치한 장사꾼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것보다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사기꾼으로 몰리는 일은 또 있다.
우리 가게가 마음에 든 며느리가 어머니 댁에 쌀을 보내드렸는데 어쩐 일로 항의가 들어오는 일도 있다. 쌀이 안 좋아서 어머니한테 면목 없는 며느리가 됐다는 거다. 쌀이란 것이 벽돌처럼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이 아니다 보니 파는 사람도 모르게 품질이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벼 원료를 대량으로 구입하다 보면 산지 정미소 사장도 모르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 이럴 때는 아닌 말로 환장한다.
오늘 낮에도 강구항 사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왜 이렇게 쌀을 흘려놨냐고 하신다. 오늘 새벽 배송 길에 쌀통에 쌀을 부어드리고 왔는데 좀 흘렸나 보다.
장사꾼은 식당에서 전화가 오면 무조건 네~네~ 한다. 특히나 요즘처럼 문자나 카톡으로 주문하는 세상에 사장님들이 직접 음성으로 전화해 올 때는 나도 모르게 움찔한다. 혹시 무슨 일이 잘못되었나 싶은 마음에서다.
어쨌든 사람은 무조건 겸손하고 볼 일이다.
환경에 적응하라. 단군의 맛!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