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주: 먹고살기 힘든 5, 60대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던지는 삶과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입니다. 쌀장사로 20년을 살아온 제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풀어보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뭘까?
대학시절에 경남 마산에 있는 ‘애솔배움터’라는 야학에서 중학교 입학 자격 검정 과정 국어를 담당했었다. (장사꾼이 된 지금 띄어쓰기가 너무 어렵다. 한글은 너무 어려워..!)
요즘에는 배움의 시기를 놓친 분들을 위해 다양한 교육과정들이 많이 개설되어 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서 언제든지 편한 시간에 강의에 접속해서 공부할 수도 있다. 학생구성도 한글을 깨우치고자 하는 나이 지긋한 6,70대 노인 분들이 많은 편이다. 예전과 달리 야간학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아쉽지만 바람직한 현상이다.
1990년대 후반 까지만 해도 야학에는 10대에서 20대 중후반 나이의 청년들이 많았다. 나와 같은 또래의 학생들이 스무 살이 넘어서야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한다는 것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서로 비슷한 나이인 나에게 선생님, 선생님하면서 나를 깍듯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애솔배움터의 교가는 들국화의 ‘사노라면’이었다. 월요일 저녁에는 전교생이 모여서 교가를 불렀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학생들도 가난하고 선생들도 가난했다. 교실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님이 쓰는 교회 1층 소회의실 몇 개를 저녁에 빌려 쓰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 한다. 서로 비슷한 나이들이니 학생들이나 선생들이나 얼핏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학생들도 주경야독해야 했지만, 선생들도 전문적 지식이 무르익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여서 수업 전에는 진땀 흘리며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 중학교 입학 자격을 주는 초등과정 검정고시는 애초에 그리 어렵지 않아서 내가 국어를 맡고 있던 해 검정고시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합격하여 전원에게 중학교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 큰 보람이었다.
애솔 배움터에서 나오는 교지가 있었다. 교지 이름은 ‘애솔’이다. 애솔은 막 자라기 시작한 어린 소나무를 말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몇 년 동안 발행되지 못하다가 2,3년에 한 번 꼴로 발행되곤 했다.
내가 국어를 맡고서 나는 몇 년 동안 나오지 못한 교지를 발행해 보고자 했다. 한글을 깨우치고자하는 바람이 큰 야학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탐독하는 과목이 국어일 수밖에 없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국어담당 선생이 아닌가.
교지에는 배움터에 들어와 한글을 깨우친 학생들이 고민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적은 동시와 수필이 실렸다. 학생들이 직접 지은 글을 실어서 글을 배운 보람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마흔 중반 학생 아주머니의 글도 실렸다. 학생들의 글은 필체가 좋은 선생님들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직접 써서 복사하여 책으로 묶었다.
교지가 나오던 날, 자신들이 쓴 글과 이름이 책에 실려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던 나이 많은 만학도들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편집장으로서의 소감도 실렸다. 학생들이 글을 깨우치고 스스로 할 말을 글로 적을 수 있게 되다니!
학생들도 기뻤지만 나 자신이 너무 기뻤다. 애솔배움터 국어 교사 생활에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할까에 대한 고민을 어렴풋이 하게 된 것은 참으로 소중했던 시간이다.
사회에 나오기 전 대학시절 나는 사회운동을 하는 사회운동가를 꿈꿨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역 NGO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나의 직장은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에 있는 신용협동조합이었다. 지금은 해운대신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직장에서 막내 생활을 하면서 마침 그때 새로 만들어져 첫활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던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곳에서 사회활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