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모르는 타인에게서도 희망을 얻는다.-
-얼굴 모르는 타인에게서도 희망을 얻는다. -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고(故) 노회찬 의원의 명연설이 있다. 2012년 진보정의당 당대표에 선출되면서 진행된 연설이다. 6411번 버스는 강남을 경유하는 서울시내 노선버스인데 매일 새벽마다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을 소개했다.
새벽 4시.
6411번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서울 하고도 강남의 빌딩 숲 속에서 직장인들이 출근하기 전에 높고 높은 빌딩 구석구석을 청소해 놓는 청소 미화원들이다. 6411번 버스는 출발 시점부터 늘 만석인 채로 미화원들의 새벽 출근을 담당한다. 그런데도 아침 출근시간이나 낮에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새벽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버스를 이용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삶에는 과연 어떠한 힘이 우리 몰래 숨어 있기에 그렇게 오랜 세월에도 매일 아침 지치지 않고 어둠을 이겨내고 일을 하게 하는 것인가? 과연 그 무엇이 우리에게 끈질긴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가?
살다 보면 모르는 타인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서로서로 용기를 얻을 때가 있다. 6411번 새벽 버스를 이용하는 투명인간끼리도 같은 시각,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내 고향은 서부경남으로 불리는 곳이다.
서부경남은 말 그대로 진주 고성 사천 삼천포 등 경상남도의 서부 지역을 말한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1980년대 초중반의 농촌마을은 아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넉넉한 환경도 아니었다. 겨울철 비닐하우스 등 채소 작목을 하는 농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된 작목은 쌀이었는데 쌀농사는 가을 추수철에 잠시 돈을 만져볼 뿐 사철 돈이 나올 곳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를 비롯해서 고향마을의 아주머니들은 밭에서 나는 시금치나 상추 같은 채소류 등을 내다 팔아 돈을 만질 수 있었다. 때로는 마을 앞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냇가에서 잡은 소라를 내다 팔기도 했다.
마산역 주변에 번개시장이 섰다. 새벽에 잠시 섰다가 점심 전에 파해서 번개시장이다. 이 번개시장에 마산 인근 반성, 함안, 군북 등지에서 농사지어 준비한 채소류를 팔러 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도 밤늦도록 준비한 채소 등을 잘 마무리해놓고 다음날 마산역으로 가는 새벽 기차를 탔다.
새벽 4시.
집에서 3km쯤 떨어진 반성 역까지 바리바리 싼 짐을 순전히 머리 위에 동이고 간다.
우리나라 열차중에 비둘기호라고 있다. 비둘기호는 1984년에 비둘기호로 개명되어 2000년 11월까지 운행되었던 대한민국 철도의 최하위 등급열차이다.
반성 역에서 마산 가는 비둘기호 새벽기차를 타면 6시쯤에 마산역 앞 공터에서 잠시 열리는 장마당에 짐을 부릴 수가 있다. 오전 10시쯤 까지는 반드시 물건을 다 팔아야 한다. 반성 역으로 돌아오는 기차가 마산역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기 때문이다.
오전 10시쯤에 돌아오는 기차를 타면 12시 30분쯤에 다시 반성 역에 도착한다. 집까지는 다시 또 걸어야 한다. 걷고 또 걷는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점심 값도 아까워서 허기를 참고 집에 와서 찬 없는 점심밥을 드셨다. 그리고는 또 오후 내내 푸성귀들을 다듬어서 다음날 새벽 다시 마산역 앞 번개시장으로 나갔다.
푸성귀 광주리를 이고 진 그 시절 아주머니들을 실어 나르던 마산행 새벽기차, 미화원 아주머니들을 강남 빌딩 숲으로 나르던 6411번 버스는 고통을 말할 줄 모르고 아픔을 숨기며 살던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꿈을 나르던 희망마차였다.
나는 밤 10시 정도에 늘 잠자리에 든다. 새벽 3시 15분에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 때문이다. 알람음은 발렌티나 리시차가 연주하는 피아노 월광이다. 출근 준비를 한다. 새벽시간에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린다. 조용조용 문을 닫는다.
새벽 4시.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시각이 공교롭게도 04시쯤 된다. 아주 오래된 일상이라 좋고 나쁜 어떤 감정이 없다. 그래도 가끔 몸이 아주 피곤할 때는 꼭 이렇게 새벽부터 구차하게 살아야 하나 하는 처량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도로에 나와 보면 의외로 차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 트럭 옆을 쌩하고 앞질러 가는 또 다른 트럭들. 일반 승용차뿐 아니라 대형 화물차, 소형 트럭, 냉동 탑차, 짐칸에 천막을 두른 포터.. 모두들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와 같이 새벽밥을 먹고 새벽부터 트럭을 몰고 쌩쌩 달리는 동시대의 사람들.
아, 나뿐만 아니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벽잠을 잊고 열심히 살고 있구나. 아, 새벽 장사 길을 나서는 우리는 얼굴 모르는 타인들에게서 끊을 수 없는 무언(無言)의 관계를 맺고 있구나.
6411번 버스를 탔던 새벽녘의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서로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살아야 한다는 끈질긴 생명력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부딪히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바람처럼 스쳐가는 차량들이 달리는 도로 위에서, 서로서로에게 말없는 관계를 통해 서로 힘을 주고받는다. 나는 마주 달려오는 트럭의 헤트 라이트 불빛에서도 동질감을 느낀다.
그 동질감이 오늘 하루 살아갈 힘이 된다.
가다가 지치면 쉬면 된다.
인생은 로드무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