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잘 사는 것보다는 다 같이 잘 살아야..
쌀장사로 20년을 살아온 제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풀어보고 있습니다.
졸업 이후 직장인으로서 나의 사회진출은 비교적 순탄했다. 직장이 있는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동은 아직 시골스런 정감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지역을 대표하는 전문 금융인이라는 긍지도 가질 수 있었고, 지역봉사라는 사회활동도 할 수 있어서 보람찬 직장생활을 했다.
내가 직장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1990년대 후반에는 다양한 사회단체(NGO: Non-Governmental Organization)들이 생겨났다. 1994년 출범한 참여연대가 대표적이다. 일반인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환경, 법률, 정치 등 시민사회 여러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직장이 있던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동에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NGO가 막 출범했다. 반송동은 부산에서 울산 방면으로 가는 끝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시가 1968년부터 1975년 무렵까지 도심의 판잣집들을 없애기 위해서 실시한 집단이주정책으로 시내의 철거민들이 반송동으로 옮겨오면서 마을의 기본 틀이 만들어졌다. (☞반송사람들, 고창권 지음)
사회단체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송 출신 의사 고창권 씨가 초대 회장을 맡고, 청년활동가 김혜정 사무국장이 실무를 맡았다. 1998년, 내가 신협의 막내로 기획조정팀에 근무하고 있을 때 첫 창립총회를 열었다. 마을 사람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는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인근 주민들이 관청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주민이 주체가 되어 준비한 ‘어린이날 행사’이다.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를 위해서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렸다. 지역 미술대학에 도움을 요청해서 그림을 전공한 학생들을 섭외했다. 소방서에도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마술 공연, 색종이 접기, 구슬꿰기 등 체험장도 준비했다.
행사 전날까지 학교의 정상 일정이 있기 때문에 모든 행사 준비는 어린이날 전야에 이루어져야 했다.
풍선을 불고, 쓰레기통을 설치하고, 체험 부스를 세우고, 화장실 안내 문구를 붙였다. 모든 회원들이 밤을 새워서 행사 준비를 했다. 학교 운동장은 회원들의 열기로 밤새 후끈 달아올랐다.
오전 9시 모든 행사 준비가 끝났다.
성질 급한 어린이들 두서넛이 교문 앞에서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회원 한 분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떡볶이, 튀김, 어묵, 달고나, 깨엿 등을 실은 아저씨들이 수레를 끌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대 언니, 오빠들이 어린이들 얼굴에 예쁜 캐릭터를 그려 주었다. 아이들 얼굴이 알록달록 예쁘게 빛났다. 풍선으로 인형을 만들어 선물하는 체험장에서는 아이들의 환호소리가 이어졌다.
이날 어린이들의 열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단연 소방관 아저씨들의 불자동차였다. 소방관 아저씨들이 화재진압 모습을 재연한 것이다. 불자동차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을 치솟자 아이들은 “우와~!” 하면서 열광했다.
나는 상상해 본다. 그때의 감동으로 지금 소방관이 된 어린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 중에서 대통령도 나오고, 국무총리도 나오고, 소방관도 나오고, 경찰관도 나오는 것이니 혹시 아는가. 나 혼자 하늘 보고 빙긋 웃어 본다.
어린이 날이 되면 지역방송 행사 일정에서도 소개되는 반송동 어린이날 행사는 작은 사회단체가 직접 주관하고 시행하기에는 매우 힘든 일임에도 20년이 넘는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동네 주민들이 직접 주관해서 준비하는 어린이날 행사는 반송동의 어린이날 행사가 유일하다.
‘반송 사람들’이라는 마을신문도 발행했다. 나는 동네를 취재하는 기자로 활동했다. 반송동은 유독 소외된 계층이 많았다.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방문해서 기사를 쓰고 궁극적으로는 주민들의 후원을 유도하는 하는 일이었다. 성분도 수도원 이해인 수녀님이 이름 지은 ‘빛둘레’ 어린이집도 탐방했다. 해운대구 송정동에 있는 해동 용궁사에서 바라본 새해 일출 기사도 썼다.
보람찬 시절이었다. 학교 시절 야학에서 정립하게 된 사회활동가로서의 삶이 눈에 보였다.
아,
그랬던 나의 직장생활은 아들의 출생과 함께 끝이 났다.
지난 장(章)에서 기술한 대로 아들은 지적장애를 수반한 선천성 뇌병변 판정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을 가족으로 두는 것은 경제적인 나락으로 떨어지는 가장 확실한 사건이 된다.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해줄 만한 친구나 선생도 없었다. 그들도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무슨 말을 해 줄 수가 있겠는가.
나는 2001년 1월 1일 장사를 시작했다. 이란성쌍둥이로 태어난 남매가 만 2살 되던 때이다. 월급보다 더 벌어서 아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턱대고 쌀가게를 연 것이다. 성급한 결정이었다.
자영업을 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의사결정이 자유로울 듯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영업자에게는 조금의 쉴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도맡아야 했다. 아파도 병원도 마음 놓고 갈 수가 없었다. 자영업자가 된 순간, 나를 따뜻하게 덮어주던 이불을 누군가 확 채 가버린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극장을 가는 문화의 향유는 언감생심이었다.
2003년 8월 ‘주 5일 근무제’의 근거가 된 정부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2004년 7월에는 마침내 주 5일제가 시행됐다.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도 주 5일제가 시작됐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제4장. 내 인생의 주인 되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뭘까?
몸으로 때우는 사람.
생활의 달인은 무심한 듯 흐르는 세월의 훈장.
늘어나는 청년 창업.
현재의 자녀교육 맹목적 대학교육 필요한가.
싫어하지 않을 정도일 때 가능성이 있다.
나는 부자.
스톡데일의 역설.
나무는 한 겨울에도 자란다.
수주대토守株待兎.
제5장. 인생은 한 방향으로 버티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