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윤의 회상
나와 나의 동기들은 동네 앞 개울에서 여름 내내 살았다.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은 저 윗동네 알 수 없는 어디쯤에서 시작해서 중간 중간 좀 더 큰 개울에 보태져 진주 남강 하류 어디쯤으로 흘러 들어가는 듯싶은데, 우리들은 그 개울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몰라도 되었다.
우리는 그저 여름 내내 물가에서 물장구 치고 겨울에는 앉은뱅이 썰매를 만들어서 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은 들판이 경지정리가 되어서 넓고 곧게 쭉 뻗어있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개울은 구불구불 유유자적 이어서 물도 흐르는 듯 마는 듯하여 마땅히 놀이거리를 갖고 있지 못했던 어린 우리 동기들이 사시사철 터 잡고 놀기에 적당하였다.
개울가에는 키 큰 버드나무들이 많았다. 나무 위로 엉금엉금 높이 올랐다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기에 좋았다. 한 줄로 줄지어 다니는 개미떼처럼 우리는 줄줄이 나무 위로 올라가서 또 줄줄이 물위로 첨벙첨벙 뛰어들고는 다시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우리는 여름 내내 이빨이 딱딱 부딪히도록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개울에는 시골 개울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붕어, 메기, 납작고기, 탱고리, 필쟁이 등이 많았다.
나중에 커서 ‘붕어’나 ‘메기’는 사전에서 찾아 볼 수 있었지만, ‘탱고리’나 ‘필쟁이’ 등은 사전에서 찾을 수 없었다. 어른들이 불러주는 물고기 이름은 사전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하여튼 ‘탱고리’는 작은 메기처럼 생겼고 ‘필쟁이’ 버들치처럼 생겼다.
지금도 나는 ‘탱고리’나 ‘필쟁이’같은 이름 외에 이것들의 정식 이름을 알지 못한다.
벼농사에는 물이 많이 들었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개울의 물을 양수기로 물을 퍼 올렸다. 개울에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놈들이 갈 곳 모르고 군데군데 바닥이 드러나 패인 곳으로 모여 퍼덕거렸다. 나와 동기들은 제각기 가지고 온 커다란 양동이로 물고기를 주워 담느라 신이 났다.
우리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마을 앞 들판 끄트머리에 있었다. 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마을에서 큰 들판을 사이에 두고 개울둑을 따라 아이들 걸음으로 한 20여분쯤 걷다가 개울을 가로 지르는 작은 보를 하나 건너야 했다. 우리는 학교를 오가다 그 보에 웅크리고 앉아서 물 위를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다.
한참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제자신이 물을 거슬러 빠르게 달려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어린 마음에 아주 재미있었다.
개울의 보는 작은 비에도 자주 넘쳐서 무릎 위까지 물이 차오르곤 했다. 그러면 일, 이학년 아이들은 제대로 건너지 못했는데 오륙학년 형들이 한명씩 남아서 동생들을 업어서 건너 주었다. 딱히 누가 말해서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 서로 서로 그렇게 했다.
나도 오학년이 되어서는 보가 넘치는 날에는 자동으로 늘 개울의 보(洑)가 신경이 쓰였다.
여름에 날씨가 궂어 대수(大水)가 지면 개울에 물이 가득 차올라 둑 높이나 물 높이가 서로 같아졌는데 서울 한강의 열배는 되는 큰 강쯤 되는 듯 보이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개울을 건너지 못하고 큰 다리가 놓여있는 신작로를 따라서 한 시간 이상 걸어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큰 비에 허약한 개울은 가끔 옆구리가 터져 담고 있던 물들을 들판으로 토해내곤 했는데, 작은 개울에서 어쩌면 그리 많은 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던지...
어린 나는 -우와! 우와! 하면서 엄청 놀라서는 엄마에게로 달려가곤 했다.
둑이 터지는 해에는 논에 있던 벼가 물에 잠겨 농사가 말이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은 물이 채 빠져 나가지도 않은 논에 들어가 물에 잠긴 벼들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들판 여기저기에서 쓰러진 벼들을 안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고단한 삶이 함께 버둥거렸다.
나도 가끔 엄마를 따라 논으로 들어가 보곤 했는데 가슴께 까지 차오른 물 때문에 발걸음 옮기기도 힘들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경지정리를 하여 새로 만든 튼튼한 돌망태를 두른 개울은 이제 둑이 터지는 일은 없겠으나 사시사철 품어 뛰놀게 해주던 왁자한 아이들 소리 들을 일도 이젠 없다.
고향마을은 텅 비어 이제 한 십 여 호 남았다.
2007년 하재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