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프레임에 벗어난 사람을 오류로 판단하는 순간

by 피디아

언젠가, 시험 감독관으로 들어갔던 적이 있다.

내가 면접관은 아니었지만,

지원자들이 들어오고 자리에 앉아 진행되는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감독하는 역할이었다.


첫 번째 수험생이 들어왔다.

뭔가 큰 뜻이라도 품은 듯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실과 열정, 그리고 사랑으로 XXXX의 밀알이 되고 싶은 1번 수험생입니다."


듣는 순간 속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지, 준비된 대사인가? 형식적인 인사말. 기계적인 슬로건.

'그냥 주어진 문제에나 대답하지, 저게 뭐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못돼 쳐 먹었다.

워낙 건조하고 냉소적인 성격이니 놀랄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열 번째까지.

조금씩 말투는 달라도, 똑같은 슬로건이 이어졌다.

마치 입시학원이나 취업 코칭에서 알려준 템플릿을 따라 하듯이.

그리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무뎌지기 시작했나 보다.

아, 이게 기본 포맷인가 보다. 틀에 맞는 말. 해야만 하는 말.



그렇다면, 하지 않는 사람은?


열네 번째인가의 수험생이 들어왔다.

별다른 슬로건 없이 차분하게 앉아서 인사를 한 뒤,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변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불편하고도 올바르지 않은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수험생은, 간절하지 않은 건가?'


그리고 그 생각이 들자마자 스스로에게 놀랐다.

간절함을 이런 방식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모르는 사이, 슬로건 없는 수험생을 '간절하지 않은 자'의 프레임에 넣어 분류하고 있었다.

반복된 형식이 나에게 하나의 기준을 심어줬고, 그 기준을 벗어난 누군가를 비정상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더 웃긴 건, 나는 그 슬로건에 회의적이었고,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인간이었다는 거다.

처음에 나는 형식에 물든 사람들을 우습게 여겼다. 그 모습이 진실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형식이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심지어 아무런 권한도 없는 주제에.


그 열네 번째 수험생을 보고 내가 느낀 건,

그 사람에 대한 게 아니라 앞선 열세 명에 길들여진 내 뇌의 자동 반응이었다.

이게 아마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내는 무서운 일관성일 거다.

나도 모르게 다들 하니까 '해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인 것.

그리고 안 하면, '뭔가 틀에 어긋났다'고 느끼는 그 무서운 착시와 편견.



그날 나는 배웠다.


형식은 반복되면 기준이 되고,

기준은 무조건적인 평가로 이어진다.

슬로건의 유무는 본질과 무관했지만, 그 반복 앞에서 '기본값'처럼 느껴졌다.

그 틀을 벗어난 누군가를,

정당한 이유 없이 결핍된 사람으로 분류했다.


그날 나는,

누군가를 판단할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이미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처음에는 비웃었던 형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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