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그리고 다시 시작

by 여정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8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직장인이었을 때보다 1시간 늦게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부엌에 가서 반찬을 꺼내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뒷정리를 끝내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책장을 마주했다.


어제 정리하지 못하고 옆에 쌓아두었던 가져온 책들과,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바라보았다. 책장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중구난방으로 꽂혀있었다. 더 이상 읽지 않는 어린이 동화책, 학습만화, 문제집도 있었다.


찾았다. 지금 해야 할 일. 책장을 정리해야겠다.


일어나 서서 옆구리를 늘리는 스트레칭을 하며 책장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먼저 어렸을 적 읽었던 책들 중에 더 이상 읽지 않을 흥미 위주의 책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문화상품권이 생기면 서점을 가는 것이 나름의 취미였다. 무슨 책을 살지 미리 정해놓고 가지 않았다. 한 손에는 문화상품권을 들고 서점 안을 몇 바퀴씩 돌면서 살 책을 골랐다. 베스트셀러 칸에 가서 고를 때도 있었고, 한창 책을 읽자는 유명 TV 프로그램에서 추천하는 책을 사기도 했다. 그런 책들이 내 흥미를 끌지 못할 때는 그냥 제목이 끌리는 것 중에서 꺼내 들어 책 소개와 첫 부분을 읽어보았고, 마음에 들면 그날 그 책은 내 것이 되었다.


어떤 날은 글을 읽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림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만화책은 문화상품권으로 살 수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 학습 능력에 도움이 되는 것을 골라야 했다. 내가 무슨 책을 샀는지 엄마에게 확인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만화책은 대여점을 이용하는 것이 옳았고,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기에 나는 타협점으로 학습 만화를 샀었다.


이 학습 만화가 나의 책 정리의 첫 대상이 되었다. 우리말을 알려주는 만화, 각 지역의 고유 방언을 알려주는 만화, 조선왕조 500년을 알려주는 만화 등등 하나하나 내 옆에 쌓였다.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이곳저곳 흠집이 난 이 책들은 지금은 버려지지만 그래도 사랑했던 책들이었다. 마치 더 자라지 못하고 어린 시절의 머물고 있는 친구와는 더는 교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애틋한 마음은 남아있는 것처럼.


그것들을 들어내니 책장의 한 칸 정도는 비워졌다. 그러면서 나는 책들을 나름 정리하여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전공 책들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이직을 생각하면 아직 이 책들은 나와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책들은 한 칸에 몰아 꽂아 넣었다.


사진 앨범들도 책장에 있었다. 엄마, 아빠의 결혼 앨범, 어렸을 적의 내 모습이 담긴 앨범 몇 권과 나의 졸업앨범들. 대학교 졸업 앨범은 어찌나 두꺼운지 이걸로 머리를 맞았다간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제일 아래 칸에 모아 두었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나와는 다른 삶들, 다른 시공간에 놓인 인물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학업의 압박, 사이좋을 때가 많지 않던 부모님,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공부하는 시간, 친구들과 수다 떠는 시간 외에는 책을 읽으려 했다.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통학하던 버스 안, 쉬는 시간 교실 안 내 자리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책장에는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비문학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논술 공부를 위해서, 학습 능력 향상을 위해 억지로 읽었던 책들이 최소한의 비율로 내 책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책들도 귀한 것이었다. 지식과 철학의 언어였고 또 그 보배의 나눔이라고 할 수 있으니. 나는 이 책들을 꺼내어 다른 한 칸에 모아두었다. 언젠가는 다시 읽어보리라 하고.


나머지는 이제 소설책들만 남았다. 현대소설, 세계문학, 고전 등 다양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제목을 눈에 담던 중에 책 하나에 머물렀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무척이나 사랑했던 이야기였다. 어린이 판, 청소년 판, 완역판 모든 판본을 자라면서 몇 번을 읽었던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읽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아마도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그때 완역판을 마지막으로 읽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온전히 내가 선택한 책은 읽지 않았다. 대신 시험에 나올만한, 논술에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었다.


‘제인 에어’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미 여러 번 읽었고, 영화로 나온 것도 다 보았지만 글자를 통해 다시 그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지금 나이에 다시 읽는 이 소설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고, 또 이 책을 통해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난 이 낡은 책의 표지를 눈에 담아두고 책장에 꽂았다.





짐들을 다 정리하고 쉴 만큼 쉬었을 때, 퇴사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는 슬슬 부모님의 눈치를 보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나 역시 좀이 쑤시고 있었다. 충분히 늦잠을 자고 티비를 보고 스마트폰을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생산적이지 못한 나 자신이 이제는 싫어졌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이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당초에 엄마에게 이야기했듯이,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내가 지금 세울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였다. 나에겐 전 직장에서 준 퇴직금이 있었고, 그것을 다 쓰기 전에는 재취업을 해야 했다.


노트북 앞에 앉아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한 카페와 공기업 입사를 위한 카페에 가입하고 정보를 탐색했다. 일단 두 가지 모두를 다 같이 준비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찾아보다 보니, 인터넷 강의와 교재를 구매해야 했다. 초기 비용이 꽤나 많이 들었다. 문득 이 수험생 생활이 길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그래도 일단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한 것은 일과표를 짜는 일이었다. 일단 공부만 하루 종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일과 주말을 좀 다르게 하여 하루 일과와 일주일 스케줄을 짜기로 하였다. 평일은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오전과 오후 시간은 인터넷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는 것이고 저녁을 먹고 나서 러닝을 하면서 쉬고 씻은 다음 복습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주말에도 공부를 하지만 운동과 쉬는 시간을 늘렸다.


누군가 보면 아주 널널한 시간표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안의 간절함이 덜해서인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절대적으로 내 시간을 남겨두고 싶었고, 그 시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다. 거기에는 지구력을 위한 운동이 있었고, 그리고 책을 다시 읽고자 했다.


그렇기에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 시간에 대한 계획이었다. 공부에 대한 계획보다는 내 시간을 어떻게 쓸까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런데 책을 혼자 읽는 것도 좋았지만 나만의 것으로 둘러싸이고 싶지 않았다. 내 느낌과 생각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귀한 이야기들을 나 혼자 향유하는 것은 너무도 아까웠다.


그래서 나는 나서기로 했다. 앞에 나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고, 대세에 따라 움직이는 나였지만 왠지 지금은 좀 달랐다.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 평소에 걸리는 시간보다 훨씬 짧았다. 모바일로 지역 오픈 채팅방을 만들었다. 채팅방의 이름은 “사파동 북클럽”이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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