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아!”
번쩍 눈이 떠졌다. 눈앞에는 엄마가 서있었다. 창밖을 보니 벌써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지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엄마가 나를 깨운 것이다.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니,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직장에 다녔을 때 주말에 겨우 시간을 내어 내려온 집에서 내리 잠을 자던 나를 보던 눈과는 달랐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엄마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짐 정리하라는 말만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멍하니 열린 방문 틈을 바라보다가 짐을 정리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책이나 서울에서 썼던 생활용품들은 며칠 전 서울에서 택배로 보내놓았었다. 그 상자들은 뜯어지지 않은 채 방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버릴 것은 다 버리고 왔다. 서울 생활 내내 썼던 이불도 버리고, 더 이상 입지 않은 옷들도 버렸다. 주변에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은 다 나눠주고 왔다.
상자를 마감한 테이프를 뜯어내며 챙겨 온 옷가지들, 책들을 꺼내었다. 옷은 옷장에, 책은 책장에 넣었다. 옷은 빈자리가 있어 채우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책장은 또 달랐다.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면서 두고 간 책들이 이미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거기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서점에 들락거리며 샀던 책들이 가득했기에 가져온 책들은 일단 책장 옆에 쌓아두었다.
그렇게 정리를 한창 하던 중에 저녁 식사 냄새가 풍겨왔다. 그리고 곧 아빠도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나는 그때는 밖으로 나가 퇴근한 아빠를 맞았다.
“아빠.”
“어, 왔냐?”
아빠는 내가 반가운 모양이었지만 그다지 티를 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빠도 가라앉은 엄마의 기분을 조심하고 있었다. 사실 일을 그만두고 내려오고 싶다는 나의 말에 찬성해 준 사람은 아빠였다. 나를 믿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어디 하나 길게 붙어있지 못했던 아빠가 유일하게 나의 마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밥 먹어.”
건조하게 떨어지는 엄마의 말에 음식이 차려진 식탁 앞으로 갔다. 나는 아직 놓여 있지 않은 수저를 하나하나 놓았고, 우리 세 사람은 수저를 들었다. 식사를 시작하고 한 오 분간은 아무 말하지 않다가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언젠가는 던져질 질문이었지만 하필 집에 돌아온 뒤 처음 먹는 식사 자리라니. 엄마는 그렇게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은 좀 쉴래. 쉬면서 자격증도 하나씩 따고, 공부도 하려고.”
이제 막 백수가 된 나는 이직을 준비해야 했지만 일단은 쉬고 싶었다. 지난 4년간, 아니 20살부터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니 어쩌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나는 쉬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의 분신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엄마의 꿈이 무엇인지 나는 들어본 적 없었고, 엄마도 말한 적 없었으니까. 그저 시골의 세상물정 모르는 막내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빠를 만나 나를 낳았다는 것. 그때부터 엄마는 엄마로 살아왔다. 집안 살림을 챙기고, 나에게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여러 일을 쉬지 않고 해 왔다는 것 정도만 알았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
우리 집이 이 정도 살 수 있었던 건 엄마의 공이 컸다. 더 좋게 살아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런 것에 무관심했던 아빠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 덕에 엄마는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오로지 그 질문은 나에게 던졌다. 엄마의 말처럼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잘나야 했다. 공부를 잘해야 했고, 그에 따른 압박이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없는 살림에 엄마는 나를 학원에 보냈고, 과외를 시켜주었다. 투자를 한만큼 성과가 있어야 했기에 나는 열심히 해야 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에는 엄마는 나보다 더 화가 나있었다.
그래도 그 덕분인지 중학교에서는 전교 1, 2등을 다퉜고, 남들이 다 좋다 하는 기숙형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대학도 대한민국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에 합격했다. 대학에 합격하던 그날 저녁, 엄마는 눈물을 흘렸고 그때 나는 이 모든 괴로움이 드디어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엄마는 나에게 관대해졌으며, 남들에게 유일하게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되면서 엄마의 손이 뻗칠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조금은 자유를 맛보았던 거 같다.
하지만 습관이 되어버렸다. 나는 온전한 자유는 뭔가 불안했다. 완전히 놓는 것은 두려웠다. 학기가 끝나고 받은 낮은 학점은 여전히 엄마에게 말하기 두려웠다. 평균 이상은 했지만 올 A+을 원하는 엄마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 때문에 남들 다한다는 휴학도 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다는 데, 엄마는 반대했다. 그 시간이 아깝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1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무의미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내 젊은 날, 그 1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아무 가치도 없는 시간이 되었을까?
그래서 나는 쉬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직장도 졸업 후 공백 없이 곧바로 입사하였고, 정신을 차려보니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남들이 보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복에 겨운 소리 하지 마라, 너보다 더 힘들게 자라난 아이들도 있다, 너는 운이 좋았다고. 실제로 그 말들이 내가 지겹도록 들은 소리였고, 그래서 난 쉬는 시간 없이 달려왔다. 나는 다시 어렸을 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달려온 마라톤을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누가 돌아가겠는가.
다행히 엄마는 더 묻지 않았다. 엄마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늘 말 잘 듣고 모범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던 딸이, 정말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힘들다고 했던 딸의 말이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오늘 새삼 실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식사 시간은 끝이 났고 집으로 돌아온 첫날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내일은 평일이었다. 어제 마지막 출근을 했었고, 오늘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라면 내일도 출근을 해야 했겠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야 했겠지.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