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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by 작은영웅

커피를 좋아한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제대로 하루를 살아내지 못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아침을 여는 신호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중독에 가까운 습관이지만 커피를 마셔야 정신도 맑아지고 화장실도 가고 하루를 잘 살아낼 것 같은 용기마저 생기니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커피맛을 섬세하게 구분하는 사람은 아니다. 고소한 맛과 산미 정도, 진한 맛과 약한 맛 정도를 구분하는 정도이다. 참고로 고소한 맛에 진한 맛을 좋아한다.

내 생애 최초 커피와의 만남은 향기로 기억된다. 시골 마을에 살면서 돈을 많이 벌었던 아버지는 몇 가지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LP판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다. 아빠의 방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곤 했는데 지금에 와서 음악이 어떤 종류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슬픈 음악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슬픈 음악이 아니었을까 싶다. 슬픈 음악은 나의 가슴 깊은 곳의 무언가를 건드렸으니까.


그렇게 음악을 들으면서 엄마와 아빠는 커피를 마셨다. 당시에는 무척 귀한 것이었으니라. 매일 드시지는 않았고 가끔 드신 것으로 미루어보아 바나나처럼 귀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버스가 하루에 한 번 다니는 시골 마을에서는.

그 커피를 내릴 때 향은 나를 매혹시켰다. 너무 맛있어 보였다. 엄마는 아이들이 마시면 머리가 나빠져서 바보가 된다면서도 맛은 보여주셨다. 쓰기만 하고 단맛은 전혀 없는 아주 실망스러운 맛이었다. 그래서 커피는 향기는 좋지만 맛은 별로인 것으로 내 기억에 잊혔다.


그 커피와 다시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 학교에 생긴 자판기였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해야 할 시기였으므로 굳이 머리가 나빠지는 것을 마실 필요는 없었고 용돈이 궁해서 커피 살 돈으로 빵을 사 먹는 것이 더 가성비가 좋았으니까 많이 마시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판기 커피의 달달한 맛은 늘 마음을 끌어당겼다. 당시에는 수업 시간에 반장이(보통 부잣집 아이) 수업 시간마다 커피 한잔을 교탁에 놓아두면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그 커피를 마시면서 수업을 했다. 그게 너무 부러워서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결심하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커피는 정말 많이 마셨다. 엄마는 커피가 건강에 해롭다고 내가 마시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집에서는 베란다에서 몰래 마시다 혀가 데기도 했다. 학교에서 점심은 커피와 에이스 과자였다. 비 내리는 날 빈 강의실에 앉아서 먹는 그 조합은 외로운 소녀에서 안성맞춤이었다. 엄마의 잔소리에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던 착한 딸에게 커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마저도 못 마시게 했으니 도대체 무얼 먹고살라는 것이었는지.


스물 갓 넘은 나이에 시작한 직장 생활. 출근하면 첫 일과가 커피를 타는 것이었다. 20잔 정도의 커피를 매일 탔다. 프림을 잔뜩 넣으면 정말 고소한 맛의 커피가 되었다. 그 커피를 책상마다 배달하는 서비스를 마쳐야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맛에 대한 칭찬에 뿌듯했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그 일에 자부심마저 느꼈던 것 같다.


힘든 직장 생활에 커피를 마시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다. 아침에 한 잔, 출출해서 한 잔, 점심 먹고 한 잔, 오후에 지치면 한 잔. 이렇게 무려 4잔의 커피를 매일 마셨다. 프림이 몸에 안 좋다는 얘기가 많아서 집에서는 원두커피를 마셔보지만 막상 출근을 하면 막노동하는 사람들이 막걸리를 마시듯 달달한 인스턴트커피로 기력을 보충했다.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던 인스턴트커피와 결별하게 된 계기는 블랙커피를 마실 때 간식을 함께 먹는 타협안이었다. 쓰디쓴 커피도 달달한 과자와 함께 마시면 먹을 만했다. 빵이나 과자와 곁들여서 먹는 방법으로 아메리카노의 신세계로 들어갔다. 지금도 커피를 마실 때는 더운 날 아이스아메리카를 마실 때는 제외하고 꼭 디저트를 대령시킨다. 커피맛을 좋아하는지 같이 먹는 디저트를 좋아하는 건지 헷갈리지만 커피만 마실 때는 있어도 디저트만 먹을 때는 없기 때문에 커피가 우선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커피의 힘은 막강하다.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운치 있는 곳에서는 설렘을 배가시키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낭만을 증폭시킨다.

여름날, 산책을 하다 열이 오른 몸을 식히기 위해 마시는 아이스아메리카노, 찬바람 이는 계절에 바닥에 뒹구는 낙엽을 보며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주는 인생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단지 요즘은 갱년기 증세로 오후에 커피를 마시면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바람에 오전에만 커피를 마실 수 있음이 아쉬울 뿐이다.

그래도 아침이라도 마실 수 있는 이 기쁨을 더욱 열심히 누려야겠다. 마실 수 있을 때 마시자가 나의 모토이다.

자, 이제 커피 한 잔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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