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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by 작은영웅

운동 분야에 있어서는 늘 뒤처지는 사람, 그게 나다. 어릴 때부터 몸으로 하는 것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사방 놀이를 할 때도 한 사람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편을 먹고 할 때는 깍두기가 되곤 했다. 보통 깍두기는 너무 잘하거나 너무 못하는 아이들이 공정한 게임을 위해 양편에 모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데리고 놀아준 친구들한테 감사할 따름이다.

잘하지 못하니 재미도 못 느꼈다. 놀이보다는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역할극 하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 달리기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운동회 때나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하면 꼴찌는 늘 나였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면 ‘차라리 걸어라’ 이런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꿀을 먹으면 달리기를 잘할 수 있다고 해서 먹어보기도 하고 집마당에서 뛰는 연습을 해보기도 했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작은 운동장을 여러 바퀴를 뛰면 워낙 느려서 한 바퀴 정도 뒤쳐진 나를 선생님이 일등으로 착각해서 테이프를 끊기도 했으니 그 정도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달리기를 안하고 살 수 없는 세상이었다. 고3 때 대학에 가려면 체력장 시험을 봐야 했다. 340점 만점에 20점이나 해당되었는데 대학이라는 것이 1점으로 등락을 좌우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점수였다. 무조건 20점을 기본으로 얻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15점을 얻고 있었다. 당시 학교 전체에서 20점이 안 되는 아이들이 다섯 명을 남겨 운동장에서 따로 연습을 시켰다. 매달리기는 목을 턱걸이에 걸어 놓은 상태로 버티고 밤마다 윗몸일으키기 연습을 해서 어찌어찌 17점을 얻었다. 우리 학교에서 20점을 얻지 못한 유일한 아이였다.

이토록 나를 힘들게 하던 체력장 종목 중에 최고봉이 오래 달리기였는데 연습할 때마다 목에서 나던 피맛이 지금도 느껴진다.


달리기를 떠올리면 피맛, 미달, 고통, 창피함, 이런 것들이 연상되었기 때문에 내 평생 달리기와의 인연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남편이 건강상의 이유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달리기, 마라톤 이런 단어들이 내주변에 끊임없이 맴돌았다. 남편이 20년 이상 달리기를 하면서 풀코스 100회를 넘어서고 페이스메이커로 뛰고 거의 주말마다 나가서 뛰는데도 난 구경도 가지 않았다. 남편이 같이 뛰자고 하면 버력 화를 내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달리기’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던 중 읽던 책들에서 달리기를 운동 삼아하는 멋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달리기에 관한 책들을 몇 권 읽어보게 되었다. ‘마녀 체력’, ‘아무튼 달리기’, ‘30일 5분 달리기’ 등. 이 중 ‘30일 5분 달리기’에서 소개하는 ‘마인드풀 러닝’이라는 개념에 도전해볼 용기가 났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속도와 호흡으로 단 5분만 달린다.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 속도로 편하게 호흡하면서 달린다면 그것도 5분만.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당장 그날 헬스장에서 1시간 걷는 동안 중간에 5분을 뛰어보았다.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천천히 그냥 뛰는 자세만 취한 것이다.


5분은 할만했다. 며칠 5분 뛰기를 하다 보니 욕심이 났다. 하루 1분씩 늘려가 보자. 그날부터 1분씩 시간을 늘려가며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뛰니까 호흡이 편안해졌다. 이렇게 시간을 늘려가다 보니 30분 연속 뛰기까지 하게 되었다. 30분을 뛸 수 있게 되자, 30분이라는 시간 안에서 다양한 변주를 해보면서 달리기가 몸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허구한 날 만보씩 걸어도 움직이지 않던 뱃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몸무게의 변화는 크게 없었으나 옆구리가 슬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달리기라면 치를 떨며 싫어했던 내가 30분을 뛴다니 남편도 놀라워했다. 죽어도 못할 것 같았던 달리기를 하면서 나의 자존감도 조금은 높아졌다. 그래서인지 배우고 싶은 것들이 더 생겨났고 아침 요가, 수영 이런 것들까지 해보고 싶어졌다. 운동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던 나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운동을 나가기 전에 오만 잡생각에 시간을 미루던 습성도 사라졌다. 발전하는 자신을 보는 기쁨에 운동 시간이 되면 바로 일어나 움직이고, 다녀와서도 느끼는 뿌듯함이 나를 의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날씨가 추워서 헬스장에서 달리지만 봄이 오고 대지가 생명으로 차 오르면 거리를 달리고 싶다. 걸으면서 보는 것과는 다른 세상이 내 앞에 펼쳐지리라.

여행을 가서도 아침에 일어나 이국적인 거리를 달리는 멋진 사람이고 싶다. 남편과 함께 마라톤 대회도 나가볼 생각이다. 외국 여행을 가면 아침에 혼자 낯선 거리를 달리는 남편이 걱정되기도 했는데 이제는 같이 달리면 좋을 것 같다.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고 오직 나 자신과 승부하는 달리기라는 스포츠가 이제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조금씩 ‘달리는 사람’이 되어갈 나의 미래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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