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획적인 사람이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이 몹시 불편하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아침에는 출근하는 남편을 두고 오늘 예정된 스케줄을 미리 물어본다. 특히 저녁 시간에 대해서. 식사는 어떻게 할 것이며, 귀가 시간은 몇 시인지. 나의 일정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확인을 한다. 약간 모호할 경우에는 퇴근 시간에 다시 전화해서 확인한다.
날마다 모임이 있어도,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상관없다. 미리 알려주기만 하고 그대로 진행이 되면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중간에 일정이 변경될 때도 미리 전화를 해주면 약간 화를 내긴 하지만 받아들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참 쉬워 보이는 이 패턴을 결혼하고 30년을 살아왔는데도 남편은 잘 실천하지 못한다. 아침에 하루 일정을 알려주는 것은 어느 정도 하지만(거의 예측 가능) 일정이 변경될 때 전화 주는 것을 어려워한다.
어제 일어난 일만 봐도 그렇다. 퇴근 무렵 전화가 왔다. 원래 약속이 있었는데 취소돼서 집으로 간다고 했다. 집에 가서 간단하게 라면을 먹을 생각이라고 해서, 비록 라면이지만 어묵과 달걀, 파를 넣어 맛있는 라면을 끓어 주려고 재료를 손질하고 기다렸다. 1시간 동안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데 감감무소식이었다. 가급적 운전 중에 전화를 안 하기 때문에 참다가 전화를 했다. 금요일에 있는 교통체증까지 고려한 시간이었다.
전화를 받은 남편은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집 근처에 사는 회사동료에게 전달해 줄 서류가 있어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 아까 전화할 때 그 얘기를 해줬으면 그에 맞게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 아니냐고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집 근처면 일 마치고 15분이면 올 텐데 1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점점 화가 난 나는 다시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2시간이 흘렀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가 나던 나는 걱정으로 모드가 변경되었다. 휴대폰을 차에 두고 내려서 동료 집에 갔는데 음식 대접을 받는 바람에(요즘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집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라고 추측해 보았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분명 걸으면서 전화를 받았으니 휴대폰을 몸에 지니고 동료 집에 갔을 것이다.
거기서부터는 불길한 상상으로 머리가 회전되기 시작했다.
내가 화를 내서 삐졌나. 남편은 그런 사람은 아니다. 화났다고 일부러 전화 안 하는 스타일의 사람은 아니다. 오다가 사고가 났나.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졌으면 근처의 누군가는 전화를 받겠지.
으슥한 곳에서 강도를 만났나. 초저녁이기도 하고 이 번화한 곳에서 그럴 리도 없고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낯선 이에게 전화가 오겠지.
설마 자살 시도? 성질만 내는 아내 때문에 살 맛이 안 나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슬픔이 밀려왔다.
좀 잘해줄걸.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줄걸. 그깟 라면 재료가 뭐라고 화를 냈을까. 이제 혼자서 어떻게 살지. 여기쯤 생각이 미치니 눈물까지 나왔다.
그런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처음 내가 예측한 것이 맞았다. 길을 걸으면서 전화를 받았고, 빠뜨린 서류가 있어서 다시 차에 갔다가, 차에 핸드폰을 차에 두고 갔다가, 동료 집에 갔더니 아는 사람들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어서 같이 합류해 얘기를 나누다가 늦어졌다고 했다.
약간 어설픈 내용이긴 했다. 의심하려 들면 의심할 수도 있는 스토리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없는 얘기를 지어낼 만 큰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믿기로 했다.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으로.
그래서 조금 전에 내 마음속에 일어났던 분노-걱정-슬픔의 변주를 떠올리며 맛있는 라면을 끓여주었다.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많지만 지금 내 앞에서 맛있게 라면을 먹고 있는 이 순간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별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그러면서도 잠깐 머릿속에 드는 생각, 휴대폰을 일부러 안 받으면서 숨겨둔 애인과 놀아난 것이라면. 그리고서 이렇게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남편이 간교하지 않아도 애인이 간교해서 이렇게 하라고 알려준 것이라면.
요즘 스릴러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무한히 뻗어가는 상상력에 머리가 복잡하다.
아니다. 일단 믿자. 믿지 않으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