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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사랑

by 작은영웅

나는 유난히 팥을 좋아한다.

팥이 들어간 음식은 무엇이든 탐한다. 팥은 나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고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음식이다.

어릴 때 내가 자라던 곳은 팥을 유난히 많이 먹던 곳이었다. 여름날 저녁에는 동네에서 한 집 이상은 팥죽을 끓였으니까. 우리 엄마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긴 했지만 예술가가 작품을 빚듯 음식을 만드는 바람에 요리 속도가 느렸다.

그런 점을 아빠가 타박하기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 말로는 그 원인이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가 절대 부엌에는 들어오지 마라고 하셔서 배우지 못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일단 음식을 만들면 최고로 맛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팥죽을 끓이려면 아침부터 시작을 하셔야 했다. 팥을 삶아 팥물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에 속했으나 문제는 칼국수였다. 나의 주요 관심사는 팥물이었으나 엄마는 밀가루를 반죽해서 밀어서 만든 칼국수를 좋아했다.

옆에서 지켜보아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밀가루 반죽을 빡빡하게 만들어서 홍두깨로 밀고 자르는 과정이 너무 복잡했다. 그래서 엄마한테 자주 만들어 달라는 말을 못 했다.

아무튼 엄마의 팥죽이 완성되면 당시에는 엄청 귀했던 설탕을 듬뿍 넣어서 먹었는데 달고 고소한 맛이 기가 막혔다. 물론 설탕맛도 한몫했다. 손님이 오면 시원한 물에 설탕을 타서 내놓은 게 귀한 접대이기도 했으니까.

이 맛난 팥죽은 하룻밤만 지나면 국물과 칼국수가 굳어서 팥물이 사라지고 면발만 남은 형국이 되었다.

나의 주 관심사는 팥물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난 매일 팥죽을 먹고 싶었으나 그건 엄마 솜씨로 어려웠기 때문에 동네에서 팥죽 쑤는 집을 찾아다녔다. 숫기가 없고 내성적이었던 나지만 팥죽 얻어먹는 데는 용기를 냈다.

낮동안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아이들에게 물었다. ‘오늘 집에서 팥죽 쑤는 사람’ 그럼 누군가가 자기 집이라 말을 했고 나는 그 아이를 따라나섰다.

대부분의 집들에서는 불청객인 나를 반가워하셨고 난 팥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오곤 했다.

우리 집에서처럼 설탕을 넣어주진 않았지만 뉴슈가가 들어간 팥죽은 다른 맛으로 달아서 맛있게 먹고 오곤 했다.


이런 딸의 팥사랑을 아시던 아빠는 새로운 간식을 제공하셨다. 당시 마을에서 처음으로 냉장고를 구입했던 아빠는 마을 구멍가게에 배달 차가 오면 아이스크림을 박스로 구입하시곤 하셨다.

‘사랑하나바’란 예쁜 이름의 막대 아이스크림이었는데 난 이걸 무척 좋아했다. 누가바, 부라보콘 같은 것도 샀는데 난 이 팥아이스크림만 먹었다. 하루에 한 개와 같은 제약이 있었지만 어린 시절에 누린 풍요로움 속에는 이 간식이 존재한다.


어릴 때 방학을 하면 큰아버지댁에 놀러 갔었다. 또래인 사촌들이 있어서 재미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가는 걸 좋아했다.

게다가 늘 나에게만 용돈을 몰래 쥐어주시던 큰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빼어나셨다. 우리 엄마만큼 맛있게 만들진 않았지만 속도감이 장난 아니었다. 놀고 있다 보면 뚝딱 음식을 만들어 주시곤 하셨다.

내가 팥죽을 좋아한다는 걸 아셨는지 큰어머니는 내가 가 있는 동안은 매일 팥죽을 쑤셨다. 큰어머니댁에도 설탕은 없었지만 뉴슈가만 넣어도 맛은 기가 막혔다.

솜씨 좋은 큰어머니는 명절 때면 팥양갱도 만드셨는데 귀해서 많이 먹을 수는 없었지만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얼마 전에 조카 결혼식에서 만난 큰어머니에게 그런 얘기들을 했더니 시골집에 사시는 놀러 오면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다. 먼 거리지만 정말로 가고 싶다.


이런 팥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우리 집 냉동실은 팥 관련 간식으로 가득 차 있다. 팥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바로 냉동실로 들어가야 한다. 파리바게뜨에서 사 온 팥아이스크림들, 유명 빵집에 택배로 주문한 빵보다 팥이 주가 되는 빵들, 팥이 꼬리까지 들어 있는 팥붕어빵, 달지 않는 팥이 가득 든 망개떡.

주로 아침 식사로 먹게 되는 이것들은 커피와 곁들여서 먹는다. 이것들을 먹을 생각에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질 정도이니 나의 팥사랑은 대단하다.

카페에서 사 먹는 디저트류에는 팥이 들어간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쉽게 상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주로 베이커리카페에 간다.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팥빵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커피와 바로 만들어낸 팥빵의 조화는 그저 달콤하고 고소할 뿐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오늘은 집 근처에 맛있는 팥죽집에 가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나서 팥양갱에 커피를 마시는 곳에서 차를 마시고 와야겠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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