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함을 이겨내는 법

by 작은영웅

사람은 절박한 상황에 처할 때 두 가지 선택을 한다.

그것을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나 아예 포기해 버리거나.

나의 삶을 돌아보면 이 두 가지를 번갈아 가면서 살아온 것 같다.


20년 전 남편의 연대보증으로 집안 경제가 위기에 몰렸을 때, 나는 도피를 선택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끌어 모아 유럽 여행을 떠난 것이다.

결혼 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빚독촉에 시달리며 힘들게 살아가시는 부모님들을 보며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다.

그래서 결혼을 한 이후로 조심했다. 카드도 빚이라 여겨서 사용하지 않았고 할부라는 것도 내 사전에는 없었다. 오직 내 호주머니에 있는 돈만 쓰자는 마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무일푼으로 시작한 우리 부부의 삶은 그다지 녹록지 않았다. 둘이 열심히 벌면서 이렇게 살다 보면 안정적인 날이 올 거라 믿던 때에 보증 사건이 터진 것이다. 마음이 약해서 남의 부탁이라면 거절을 못하는 남편이 나 몰래 많은 보증을 서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져다 쓴 돈, 심지어 고급차 구입 비용까지 우리가 대신 지불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빚지기를 그토록 싫어하던 내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을 때,

나는 망연자실했고 삶의 의지를 잃었다.


어쨌든 나는 그 심각한 시기에 현실도피를 감행했다. 아끼면서 전전긍긍 살아봐야 남 좋은 일만 하는구나 뭐 그런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주위 동료 중에 뜻이 맞는 세 명이서 30일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은 친정집에 맡기고 빨간딱지가 붙어 있는 집을 탈출하고자 절박함 속에서 선택한 여행이었다.

당시 나는 해외여행이 처음이었는데 유럽은 나에게 별천지였다. 처음 10일간은 찬탄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런던에 도착해서 파리로, 유레일 패스를 활용해서 10개국의 대도시들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조금씩 가족이 생각났다. 내가 두고 떠나 온 모든 것들이 그리워졌다. 그러면서 다시 일어설 용기도 냈던 것 같다.

가장 힘들게 이 시간들을 버티고 있을 남편,

엄마의 부재에 힘들어할 두 아이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여행 후반, 잘 맞지 않은 식사와 이런저런 생각들에 힘들었던 나는 무려 5kg이나 빠진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어떻게 된 이 상황은 해결될 것이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가족들의 마음에 상처 주지 않고 잘 이겨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을 꼭 안아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을 탓하지 말고 도와주어야겠다고.

아이들을 집에 데리고 와서 벽에 붙여진 지도에 엄마가 다녀온 곳들을 표시해 주면서 나중에 꼭 같이 가자고 약속도 했다.

이렇게 나의 절박함은 도피 여행을 통해 탈출을 위한 강한 의지로 바뀌었다.


물에 빠지면 몸에 힘을 빼고 물에 빠지라고 누군가 말한 것이 기억난다. 발바닥이 땅에 닿았을 때 박차고 올라와서 숨을 쉬면 된다고, 그럼 살 수 있다고.

나에게 여행은 몸에 힘을 빼는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삶의 고비마다 여행을 다녔다.

남편이 미워질 때,

아이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 때,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느껴질 때,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이 지겨워질 때,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기력해질 때,

쌈짓돈을 털어 여행을 떠났다.

내가 빈번하게 화를 내고 예민하게 굴면 남편이 넌지지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할 정도였다.

어쨌든 그렇게 여행을 다녀오면 신기하게도 기운이 났고, 내 삶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다시 삶을 살아낼 용기를 얻곤 했다.

멀리 떠나서 나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삶의 소중함과 대단함을 느끼는 과정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해 왔다.


절박한 상황이 닥쳤을 때 뭐든지 도전해 보고, 방법을 생각해 보고, 극복하려고 애를 썼다면 조금은 더 빨리 그 상황들을 벗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나 자신은 완전히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는 소극적으로 절박한 상황들을 헤쳐나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힘든 와중에도 나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사랑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삶에 대한 유연함을 지니고 있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것을 믿는다. 죽을 만큼 힘든 상황도 견디고 버티다 보면 추억이 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하루에 감사하면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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