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아닌 독립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초등학교 6학년, 그때의 나를.
사춘기 소녀들이 그렇듯 나도 다이어리 꾸미기에 푹 빠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스티커를 붙이고, 형형색색의 펜으로 일기를 썼다. 그 다이어리 한 구석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벌써 어른이 다 되어버린 것 같다."
지금 읽으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13살의 내가 품었던 마음과 지금의 내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고, 눈물이 많으며, 차분한 겉모습 뒤에 은근히 활동적인 면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여러가지의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어른다움은 혼자 있는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예전의 나는 혼자 있는 시간보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좋아했다. 사회에서 인정해주는 어른이 되고 난 후엔 주로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완전하다고 느꼈고,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이 내 에너지를 채워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새로운 챕터가 열리면서 내 삶은 급격히 변했다. 결혼과 출산, 두 아이의 육아, 실질적인 가장이라는 책임감.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만남은 줄어들었다. 남편은 주말에만 볼 수 있었고, 아이들은 매일 매 순간 나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가정이라는 관계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사람들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던 내가 갑자기 공중분해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의반 타의반이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달라졌다. 아이들과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다 잠시 혼자가 되는 순간들이 찾아왔을 때. 그때 비로소 느꼈다. 짧지만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아이들이 일찍 잠든 밤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묵직한 해방감을 느꼈다. (물론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지만 나만의 시간이 항상 부족했기에...)
그렇게 나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내 안의 진짜 나를 마주하게 해주었다.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관심 있는 영상을 보며 나를 위한 시간을 쌓아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과거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관계 속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다는 것을. 사람들 속에서 나눈 대화는 주로 함께 있음을 위한 것이었고, 그 속에 '진짜 나'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웃어야 했던 나, 관심 없는 주제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던 나...
그렇게 얕은 물에 발을 담근 채 하루 종일 걷는 듯한 관계들에서 과감히 발을 뺐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느끼는 평온함은 그 어떤 관계에서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선물과도 같았다. 내면의 고요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나에게 묻는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어른이 된다는 건 단순히 나이가 들고 책임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선택할 용기, 그리고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길 줄 아는 것이다.
타인의 인정과 관심에서 벗어나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으로 성장한다.